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1711~1781)의 학문공동체 형성과 그 확대

- 『대산일기(大山日記)』를 중심으로

Formation of Daesan Lee, Sang Jeong`s Scholarly Community and its Expansion: -With focus on “Daesanilgi”-
김명자
조선시대사학보 제69집, 2014.6, 203-232 (3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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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大山(대산) 李象靖(이상정)(1711~1781)은 18세기 중후반 영남의 대표적인 학자이다. 그는 1739년(영조 15)부터 사망하기 직전인 1781년(정조 5) 12월 6일까지 일기를 썼으며, 이 가운데 16년 동안의 일기가 남아 있다. 일기는 이상정의 공부와 강학에 대한 내용이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이를 통해 이상정이 ‘학문공동체’를 형성하고 확대해 나간 과정과 이상정의 강학 활동이 영남학파의 흐름 속에서 어떠한 위상을 갖는지 확인하고자 하였다. 이상정의 강학은 크게 초기의 학문공동체, 학문공동체의 형성기, 학문공동체의 확대기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 시기는 30대(1740년대)~40대(1750년대)의 강학이다. 이 시기 강학을 시작했으며, 학문공동체의 초기 구성원이 형성되었다. 강학 장소는 대산서당·구담성당·집이며, 가족 및 이상정이 거주하는 안동 소호리 주변의 인물과 공부하였다. 이상정은 지방관의 향촌운영에 적극적으로 협조하고, 인근 마을의 학자들과 교유하며, 동문수학하던 벗들과도 가깝게 지냈다. 이러한 교유는 이상정의 학문공동체 형성에 기여하였다. 두 번째 시기는 40대 후반~50대이며, 학문공동체의 형성기이다. 이상정은 이 시기 가족뿐만 아니라 인근 지역의 이종수·김종덕·김종경, 혈연으로 연결된 이헌우·이규, 학연으로 연결된 권이숙 등과 함께 공부하였다. 이들은 이상정의 핵심 문인이 되었다. 학문공동체의 지역적인 범위도 안동을 비롯하여 상주·함창·단성·청송·대구 등으로 확대되었다. 마지막으로, 60대 이후 학문공동체의 확대기이다. 이 시기 이상정의 주요 활동공간은 고산정사이다. 이곳은 문인과 함께 구축하였으며, ‘이상정 학단’의 연구·강학 센터의 기능을 하였다. 고산정사는 학문공동체를 결속시키고, 문인들에 의해 학문공동체가 계승되는 상징적인 공간이기도 하다. 이상정은 영양·진보 및 안동의 瓢谷(표곡) 등에서 강학을 통해 갈암 이현일의 학문적 기반을 흡수하였으며, 文字收受(문자수수)를 통해 학문공동체의 외연을 넓히기도 하였다. 일기를 통해 이상정은 유학적 지식인의 전형적인 모습을 제시하였고, 침체된 영남의 학풍을 제고하였으며, 분열된 향촌사회를 통합시켜 나갔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四書(사서) 및 性理書(성리서) 일변도의 공부와 經世(경세)에 소극적인 점은 한계로 지적할 수 있는데, 이는 영남 남인이 중앙정치에 배제되면서 시대적 변화를 수용하고 경세를 실천할 수 있는 기회가 차단된 사실과도 관련이 있다. 다만 학문공동체를 통한 영남 남인의 결집은 한말 유학적 지식인이 시대적 의무를 실천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으며, 그러한 점에서 이상정은 18세기 중후반 영남의 지식인에게 주어진 역할에 충실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Daesan Lee, Sang Jeong(1711~1781) is a typical Yeongnam scholar in the mid-to-late 18th century. He wrote diary from 1739(Yeongjo 15) till his death on Dec 6, 1781(Jeongjo 5), and 16-year diary is left. His study and Ganghak took greater portion of his diary.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analyze the formation process of Daesan Lee, Sang Jeong`s Scholarly community and its expansion and shed light on the status of his Ganghak Movement from the perspective of the trend of Yeongnam School. His Ganghak can be divided into 3 period: ‘early scholarly community’, ‘formation of scholarly community’, ‘expansion of scholarly community’. The first period was from his 30s(1740s) to 40s(1750s). He started his Ganghak during this period and the members of his scholarly community were composed. He carried out his Ganghak at Deasan Seodang, Gudamsungdang and his home and studied with the people living in Andong Sohori, his neighborhood, and his family. Lee, Sang Jeong actively participated in the operation of Hyangchon by the local government office; exchanged with the scholars in the neighboring villages; and maintained a close relationship with his fellow students, which made great contribution to the formation of Lee, Sang Jeong`s scholarly community. The second period was from his late 40s to 50s: the formation of scholarly community. He studies with Lee, Jong Soo, Kim, Jong Deok, Kim, Jong Gyeong in his neighborhood; Lee, Heon Woo and Lee, Gyu(his blood ties) Gwon, I Sook(his school tie). These people played a critical role in his scholarly community. The regional range expanded from Andong to Sangjoo, Hamchang Chungsong, Daegu, etc. The third period was from his 60s: the expansion of scholarly community. His main active space during this period was Gosanjeongsa. He built this space and this space served a role as a study/Ganghak center of his study group. Gosanjeongsa bound his scholarly community, serving a role as a symbolic space for literary people to succeed scholarly community. Lee, Sang Jeong absorbed the scholarly foundation of Galam Lee, Hyeong Il through his Ganghak in Yeongyang, Jinbo, and Andong Phygok; and expanded the denotation of his scholarly community through Munjasusu. He demonstrated the typical image of Confucian intellectuals, enhanced the Yeongnam scholarly tradition that was in a slump, and unified the disunited rural community society. Much emphasis on Saseo and Seongrihak and neglect on Gyeongse can be pointed out as the limitations in his scholarly community. This is partially because Yeongnam Namin were excluded from the central politics and thus they had no opportunities to accommodate the chronological changes and put Gyeongse into practice. However, the concentration of Yeongnam Namin served as the foundation for the confucian intellectuals in the late Chosun fulfill their obligations of the times. In this respect, Lee, Sang Jeong has fulfilled the roles of Yeongnam intellectuals in the mid-to-late 18th centu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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