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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키워드 목차

고려시대에 크게 유행했던 打出技法은 금속판의 안팎을 釘과 망치로 두드려 문양을 도드라지게 표현하는 것으로써 入絲와 함께 고려 금속공예의 대표적인 장식기법이다. 타출로 만든 공예품은 정교한 기술수준을 바탕으로 주로 탄성이 좋은 高價의 금이나 은을 이용하여 만드는 것으로써, 그 원재료의 가치와 작업에 소요되는 제작시간 등을 고려해 보았을 때 당시의 공예 수준을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또한 입체적인 타출의 문양표현은 일찍이 고대 페르시아 지역에서 발달했던 것으로 중앙아시아의 소그드(Sogd)를 거쳐 중국 唐代에 크게 유행한 뒤, 宋, 遼, 元으로 계승되었으며 우리나라에서는 고려시대의 유물에서 많이 보인다. 따라서 고려 타출공예에 대한 연구는 당시 국제 적인 공예흐름과 대외관계의 연관성을 밝히고, 그 과정에서 고려 타출공예가 차지했던 위치를 살펴 볼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현존하는 고려시대 타출공예품은 약 40여 건으로 經匣 및 香盒, 팔찌, 장도집 등 휴대가 편리 한 장신구나 小形 화장용구가 많이 전하고, 佛龕이나 舍利器에서도 일부 보인다. 이는 이전 시대 古墳 출토의 유물이나 舍利器보다 상대적으로 많은 종류와 수량으로 타출의 단면이 더 입체적이다. 타출된 단면은 器面 안쪽에서 타출한 뒤 다시 바깥에서 魚子文기법으로 눌러주어 그 높이가 오메가 (Ω) 모양처럼 두드러졌다.
고려 타출공예품은 주로 銀을 사용하여 기형을 제작하였다. 이는 金의 산출량이 희소하고 고가였던 반면 銀은 값이 저렴하고 彈性이 작업에 적합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타출로 만든 공예품은 시간과 노력이 많이 소비되지만, 銀을 사용하여 가볍다는 장점이 있다. 당시 이러한 작업이 가능하게 했던 銀의 풍부한 공급은 太祖 23년(940)에 세워진 銀所나 銀鑛 개발이 안정적인 수급 요인으로 보았다.
전하는 고려 타출공예품 중에는 변천을 제시할 만한 편년 작품이 거의 없고, 출토지가 고분으로 알려진 경우에도 정확한 출토상황을 파악하기 어렵다. 따라서 시기 분류는 다소 무리가 있을 수 있으나 동시대의 도자기나 금속유물을 바탕으로 고려와 중국 宋ㆍ遼의 정치, 경제적 교섭과 문물 교류의 상황, 국내 정세의 변화에 따라 3시기로 구분해서 살펴보았다.
제1기는 11세기에서 12세기 전반기로 唐의 타출기법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발전시킨 遼와의 전쟁 이후, 활발했던 國信物 교류나 무역을 통해 고려에 영향을 준 것으로 판단하였다. 이는 나무 아래에서 바둑 두는 인물들을 회화적으로 타출 표현한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銀製鍍金神仙文香盒〉이 遼代 河北省 宣化區 張文藻(1029-1074)墓 가운데 복도 문 위의 〈三敎會棋圖〉와 유사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또한 張文藻 墓에서 출토된 〈木製鏡架〉를 복원한 모습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 〈金銅製鏡架〉과 유사하여 遼와의 연관성이 엿보였다. 그러나 고려는 안에 목심을 넣고 타출한 금동 판을 덧씌워 鏡架를 제작하고, 큰 구조 상단에 2단 蓮花와 봉황으로 장식한 것이 특징이다. 이 경가장식 2단 연화는 삼성미술관 〈金銅製鏡架片〉 미국 보스턴 미술관 〈銀製鍍金注子〉에도 표현되고 청자에서도 그 예가 보여 당시 고려에서 널리 유행했던 것임을 알 수 있었다. 고려는 당시 지역에 구별 없이 나타나는 탁잔에도 고부조의 타출로 받침대를 장식하였다.
제2기는 12세기 전반기에서 13세기 전반기로 앞 시기의 발전된 양식을 바탕으로 성숙기로 보인다. 이 시기의 타출유물들은 보다 다양화된 기형에 고부조의 타출 높이로 빈틈없이 채우고, 세트 제작 내지는 같은 공방에서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것들도 있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銀製鍍金打出花鳥文裝刀?〉. <銀製鍍金打出鳥文瓢形甁〉, 〈銀製鍍金打出花文팔찌〉는 시로이시 마스히꼬(白石益彦)에게서 같이 구입했다는 것으로 같은 곳에서 출토되었다고 전한다. 이 유물들은 모두 입체적인 高浮彫의 타출로 문양을 생동감 있게 표현하였고, 타출로 전변을 가득 채웠다, 특히 기벽 안쪽 면에서 문양을 두드린 뒤, 다시 바깥 면에서 배경을 魚子文으로 두드려 문양이 더 도드라져 보인다.
이 시기에는 휴대가 가능한 護身用 陀羅尼經을 넣었던 經匣이나 小佛龕도 여러 전한다. 타출로 문양을 표현한 경갑은 대부분 水草와 오리, 학, 蓮枝童子을 표현하여 하나의 문양요소로 유행했던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밖에도 ?枝文으로 타출 장식한 ?帶는 동일한 문양표현을 하기 위해서 半鑄造한 틀 위에 두드린 뒤, 타출 표현한 것을 볼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제3기는 13세기 후반에서 14세기로, 이 시기의 타출유물들은 12세기에 보였던 빈틈없는 타출이 아니라 문양의 배경에 여백이 생기고, 장신구보다는 佛龕이나 佛舍利 장엄구에 일부 타출 장식한 예가 있다. 또한 타출의 단면도 낮아지고, 이전 시기의 문양을 계승하되 간략해지는 성향을 지녔다.
고려 12세기에 전성기를 보이는 타출공예품은 13세기 후반 이후 元에 의한 수탈과 銀의 부족, 도자기의 보편화에 따른 본격적인 생산으로 시간과 노동력이 많이 소비되는 타출공예품의 수요자가 줄어든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高浮彫의 능숙한 타출기법은 조선 17세기 법주사 팔상전의 〈銀製舍利具와 金銅받침〉(1605)에도 보이는 것으로 볼 때 타출기법의 명맥은 계속 이어졌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삼국시대부터 등장한 타출기법은 고려시대에 크게 발전하고 유행한 뒤, 조선에 이어 현재까지도 꾸준히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는 금속공예의 중요한 기법이라고 할 수 있다. 앞으로는 흩어져 있는 타출공예품을 총체적으로 파악하고, X선 촬영 등의 과학적인 연구로 각 유물의 제작기법에 대한 연구도 병행되어야 할 것이다. #高麗(Goryeo) #遼(Liao) #打出(repoussé) #高浮彫(high relief)

Ⅰ. 머리말
Ⅱ. 打出기법의 기원과 제작
Ⅲ. 중국 打出공예의 전개와 한국의 유입
Ⅳ. 고려시대 打出공예품의 유행과 발전
Ⅴ. 맺음말
국문초록
Abstra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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