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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한문종 (전북대학교)
저널정보
한일관계사학회 한일관계사연구 한일관계사연구 제36집
발행연도
2010.8
수록면
39 - 65 (27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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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전기에 많은 왜사가 조선에 도항하였다. 조선에서는 이들에게 三浦宴과 路宴, 京中迎錢宴, 闕內宴, 禮曹宴, 名日宴 등의 연향접대를 실시하였으며,접대비용도 조선정부가 모두 부담하였다. 또한 조선에서는 왜사를 4등급으로 나누고, 등급에 따라 연향의 횟수, 음식의 종류와 수량, 연향시의 座次,연향의 주관자 등에서 차등을 두었다. 특히 조선전기에 왜사에게 실시한 연향접대는 그 등급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일본국왕사의 경우 그 횟수가 20회가 넘을 정도로 많았다.
조선에서는 건국초부터 내외연에서 여악을 사용하였기 때문에 왜사의 연향접대에서도 여악을 사용하였다. 그러나 여악이 폐단이 나타나자 1433년부터 隣國使臣宴에서 남악을 사용하였으며, 이는 세종말까지 지속되었다. 그러나 국가의 재정이 소모되고 또 장성하면 재예를 쓸 수 없다는 남악의 폐단이 나타나면서 여악의 필요성이 계속해서 제기되자 1461년(세조 7)에 왜?야인의 路宴에서 여악을 쓰는 예에 따라 예조연에서도 여악을 사용하였다. 그러나 이는 한시적인 조치에 불과하였으며, 그 4년 후인 1465년에야 비로소 왜?야인의 연향시에 여악의 사용이 본격화되었다.
그 후 여악의 폐지에 대한 논란이 계속되었지만, 오히려 연산군대에 들어와서는 여악이 크게 활성화되었다. 그 후 정치 일선에 등장한 조광조 등이 여악의 폐지를 요구하였으나 계속해서 여악이 사용되었다. 그러다가 1519(중종 14)년에 서울의 여기는 내연을 위해서 그대로 두는 대신 외방의 여기를 혁파하고 남악을 설치하였다.
이 같이 외방에서 여악이 폐지되자 왜?야인이 연향에 참석하지 않았으며, 지방에서도 연향시에 많은 수의 가동?무동을 구할 수 없다는 문제점이 나타났다. 이를 계기로 외방에 여악을 설치하자는 주장이 다시 제기되었으며, 일부에서는 明使가 올 때에 외방에서 임시로 여악을 사용하자고 주장하였다. 그 결과 1520년 외방에 여악을 설치하고 正殿에서도 여악을 사용하였다. 그 후 왜사의 연향접대에서 여악의 사용은 명종?선조대까지 지속되었으나,1591년(선조 24)에 일본국사를 접대할 때에 여악을 정지하였다. 임진왜란 이후에는 왜인의 연향접대에서 남악을 사용하다가 1612년에 차왜의 요청으로 삼포에서 다시 여악을 사용하였다. 그러나 1705년에 외연에서 여악을 쓰지 않았으며, 이는 왜인접대에도 영향을 주어 1714년에 는 삼포에서의 왜인접대에서도 남악을 사용하였다. 그 이후 왜인접대에서의 남악의 사용은 조선말까지 유지되었다.

목차

국문초록
1. 머리말
2. 왜사의 연향접대
3. 연향접대시 여악의 사용
4. 맺음말
參考文獻
曰文抄錄

참고문헌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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