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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蘇鉉淑 (원광대)
저널정보
한국미술사학회 미술사학연구(구 고고미술) 美術史學硏究 第271·272號
발행연도
2011.12
수록면
261 - 289 (29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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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중국 南朝 阿育王像의 造形에 나타나는 공통적 특징을 살펴보고, 그와 같은 형식이 나타나는 배경을 분석한 글이다.
아육왕상은 일반적으로 인도의 아육왕이 만든 조상으로 알려졌는데, 남북조시대에서 당대까지 중국의 瑞像으로 숭배되었다. 그리하여 아육왕상에 대한 고사와 영험이 다수 집록되어 현존하며, 또한 四川省 成都에서는 ‘(아)육왕상’명문을 가진 두 건의 6세기 조상이 출토되었다. 게다가 이와 동일한 형식의 동시기 입상과 頭像도 다수 출토되었다.
흥미롭게도 이런 아육왕상은 공통된 조형적 특징을 갖고 있다. 즉 通肩 대의는 발목을 드러낸 채 아주 짧게 입고 상체와하체에 각각 U자형 옷주름을 묘사했다. 그리고 콧수염이 있으며 두발과 육계는 두 가지 형식으로 표현되었다. 이런 특징은 4세기 오호십육국시대 불상과 통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성도 아육왕상은 4세기의 復古風으로 제작된 불상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복고풍의 출현은 아육왕상이 남조에서 갖는 특수한 성격과 관련이 있다.
아육왕상은 優塡王像을 비롯한 인도 瑞像들과 달리 경전적 근거가 없고 현재까지 인도나 서역의 발견 사례가 없다. 게다가 6세기 중엽 西魏가 成都와 江陵을 점령하기 이전의 북조에서도 아육왕상 신앙과 造像 사례가 없다. 다시 말해 아육왕상은 남조에서 창안된 도상이며, 6세기 중기까지 남조인만의 신앙 대상이었다.
남조의 아육왕상은유목민족이 건립한 북조 왕조들에 대해 남조 불교의 우월적 지위와 정통성을 드러내주는 정치적 祥瑞였다. 특히 健康의 長干寺에 봉안된 아육왕상은 4세기 전반 북쪽의 정치 중심지에서 남조 都城으로 이동해온 전승 고사를 가지고 있어 남조 정권과 남조 불교의 정통성을 드러내주는 기념물로 인식되었다. 중국에서는 5세기 말부터 국가의 흥기를 불교와 관련시키는 사상이 출현하는데 이를 가장 잘 활용한 황제는 梁武帝였다. 무제는 자신의 통치와 남조불교의 정통성을 드러내주는 아육왕탑과 아육왕상을 적극적으로 이용, 이들에 대해 대대적인 佛事를한다. 이로 인해 아육왕상 신앙은 四川까지 확대된다. 때문에 성도에서 제작된 아육왕상은 양의 정치적 상서였던 장간사 아육왕상을 토대로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결론적으로, 장간사 아육왕상은 불법이 西晉으로부터 남조로 연면히 이어져왔음을 보여주는 정치적 상서, 즉 남조불교의 정통성을 드러내는 표지였다. 그러므로 ‘연속성에 의한 정통성의 유지’라는 중국의 전통적 관념의 작용에 의해 6세기 성도 아육왕상은 4세기 형식, 즉 복고풍으로 제작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목차

Ⅰ. 머리말
Ⅱ. 南北朝時代 阿育王像의 形式
Ⅲ. 南朝 阿育王像의 出現時期와 性格
Ⅳ. 阿育王像 信仰의 擴大와 阿育王像의 擴散
Ⅴ. 復古 形式에 內在된 政治性
Ⅵ. 맺음말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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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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