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 내서재 .. 알림
소속 기관/학교 인증
인증하면 논문, 학술자료 등을  무료로 열람할 수 있어요.
한국대학교, 누리자동차, 시립도서관 등 나의 기관을 확인해보세요
(국내 대학 90% 이상 구독 중)
로그인 회원가입 고객센터 ENG
주제분류

추천
검색
질문

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권덕영 (부산외국어대학교)
저널정보
신라사학회 신라사학보 신라사학보 제34호
발행연도
2015.8
수록면
301 - 333 (33page)

이용수

표지
📌
연구주제
📖
연구배경
🔬
연구방법
🏆
연구결과
AI에게 요청하기
추천
검색
질문

초록· 키워드

오류제보하기
중국 산시성 麟游縣 新城區에 수·당대 황실의 피서 행궁인 구성궁 터가 남아 있다. 천혜의 자연조건을 활용해 웅장하고 화려하게 조성된 구성궁은 당 태종과 고종이 여러 차례 방문해 장기간 머물며 정무를 처리하고 수많은 외국 사절을 접견한 7세기 중엽의 중요한 정무공간이었다.
구성궁에 특별한 애정을 가지고 있던 고종은 영휘 5년(654)에 만년궁 곧 구성궁을 방문하여 <萬年宮銘>을 지어 돌에 새겨 자신의 방문을 기념하였다. 그것이 오늘날 전하는 萬年宮銘碑이다. 그런데 비석 뒷면에 고종을 수행한 3품 이상의 고관과 학사들이 친필로 각자의 관함과 이름을 적어 새겼다.
만년궁명비 뒷면 제명에는 48명의 고관들이 기재되어 있다. 그들은 관품의 고하와 황실과의 친소관계를 고려해 각자 적절한 위치에 자신의 관함과 이름을 적었는데, 글씨의 크기와 형태는 물론 필체가 제각각이다. 따라서 만년궁명비 제명은 전반적으로 매우 자유스러운 분위기 속에서 작성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비석의 제명 하부 제10행에 “左領軍將軍臣金仁問”이라는 짧은 글이 남아 있다. 이것은 현재까지 확인된 김인문의 유일한 필적이다. 그는 제명의 여타 관인들과 비교해 크지도 작지도 않은 크기로 세로 행을 따라 단정하게 자신의 관직과 이름을 써내려갔다. 그래서 그의 글씨는 질서정연하고 당당한 느낌을 준다. 여러 기록에 의하면, 김인문은 단정하고 온아하며 침착하고 굳센 성품으로 관대한 대인의 풍모를 지녔다고 한다. 만년궁명비 음기 제명의 김인문 친필은 그러한 사실을 말해준다.

목차

국문초록
Ⅰ. 머리말
Ⅱ. 당 초기의 구성궁
Ⅲ. 김인문의 대당외교와 구성궁
Ⅳ.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

참고문헌 (47)

참고문헌 신청

함께 읽어보면 좋을 논문

논문 유사도에 따라 DBpia 가 추천하는 논문입니다. 함께 보면 좋을 연관 논문을 확인해보세요!

이 논문의 저자 정보

이 논문과 함께 이용한 논문

최근 본 자료

전체보기

댓글(0)

0

UCI(KEPA) : I410-ECN-0101-2016-911-0018361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