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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장지연 (대전대학교)
저널정보
서울시립대학교 서울학연구소 서울학연구 서울학연구 제63호
발행연도
2016.5
수록면
117 - 148 (32page)
DOI
10.17647/jss.2016.05.63.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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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서는 조선 전기 개성과 한성의 관계를 규명하기 위해서 먼저 개성인들이 건국에 대한 반대로 소외되어 왔다는 설화의 역사적 진실성을 검토하고, 개성과 한성을 점 대 점의 관계로 설정하여 살펴보았다.
개성 소외 설화를 검토한 결과, 태조대부터 태종대까지 개성에 천도해있던 동안 정기적으로 과거가 실시되었으며, 충분한 액수의 인원들을 선발해왔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정종대 개성 천도가 단행된 것으로 보아도, 개성이 건국층에게 적대적인 분위기였다고 보기는 힘들었다. 두문동 은거 설화는 18세기 이후 폭발적으로 조상의 현창과 함께 유포되었으며, 실제 거론된 인물들의 당시 행적을 보면 지방의 자기 근거지로 낙향하는 등, 설화들 대부분은 조선 전기의 실제 상황에 부합하지 않았다.
건국 후 개성과 한성의 관계는 크게 세 시기로 나누어 보았다. 1438년(세종 20)을 기준으로 이전과 이후를 (1)과 (2)시기로, 성종대 이후를 (3)시기로 보았다. 이는 제도적 변화를 기준으로 한 것인데, 1438년(세종 20)은 開城留後司에서 留守를 장으로 하는 開城府로 변화한 시점이다. (3)성종대 이후는 『經國大典』 체제가 자리잡은 것을 기준으로 하였다. 시기에 따른 변화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시기는 수도가 한성으로 전이됨에 따라 인구가 급속도로 유출하였다. 제도적으로는 개성을 옛 수도로서 한성과 같은 범주에서 다루는 방식으로 매우 우대하였으나, 실제 도시적 차원에서는 인구 유출로 인해 급속히 세가 축소되었다.
(2)시기는 그 결과 개성부의 위상이 격하되며 이전의 우대책이 혁파되거나 재조정된 시기였다. 그에 비해 한성은 개성에 대해 확실한 우위를 다져갔다.
(3)시기는 (1)~(2)시기의 결과 개성이 옛 수도라는 상징적 의미와 도시 규모의 실제가 부합하지 않는다는 점이 분명해진 시기였다. 그러나 이러한 위기의식은 개성인들에게 ‘개성인’으로서의 자각을 가져오는 바탕이 되었으며 “옛 수도”라는 상징적 의미는 그 자각의 중요한 자원이 될 수 있었다. 중앙에서는 개성의 도시규모와 수준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역사도시로서 개성에 대해 새로운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그 지점에서 중앙과 개성의 인식이 교차하면서 “로컬 개성”의 범주화가 가능해졌으며, 16세기 “개성 지식인”, “개성 상업”등이 진작되는 새로운 분위기로 계승될 수 있었다.

목차

Ⅰ. 들어가며 - 점으로 보기
Ⅱ. 개성 소외 설화의 역사적 진실성
Ⅲ. 점과 점 - 15세기 개성의 空洞化와 16세기의 변화
Ⅳ.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
국문초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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