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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실학회 역사와실학 歷史와實學 第62輯
발행연도
2017.4
수록면
77 - 115 (39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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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의 연구 히스토리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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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조선 전기 귀화인 童淸禮의 대여진 활동과 그것이 조선의 대여진 관계에서 차지하는 의미에 대해 검토한 것이다.
건국 초기 조선은 대내적 안정과 더불어 북쪽의 변방 안정이 매우 중요하였다. 이 때문에 조선은 북쪽 변방에 흩어져 살고 있던 여진을 藩籬로 인식하였고, 그들을 좀 더 효율적으로 통제하기 위하여 여진 귀화인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 이들은 동류들을 회유하거나 여진의 형세를 살피기도 하고 노략해간 인구나 도망한 향화인을 쇄환하는 역할 등을 담당하였다.
동청례 가문은 이와 관련하여 여러 활동을 수행한 대표적 가문이었다. 이들은 조선 전기 여진정책이 북방의 상황에 따라 다변화하는 시점에서 항상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특히 동청례는 선조들의 활약에 힘입어서 성종·연산군 대 활발한 활동을 펼친 인물이었다. 당시 建州三衛 추장들은 동청례 일족으로 구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여진과의 관계에서 그의 교량적 역할은 큰 비중을 차지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는 변방의 울타리인 城底女眞의 동향까지도 정확하게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조선의 북방 안정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러나 동청례는 중종 3년(1508) ‘辛服義의 獄’에 연루되어 사망하였는데, 그의 사망 이후에는 여진과의 관계에서 교량적 역할을 수행할 인물이 거의 없었다. 이로 인해 조선은 건주삼위 뿐만 아니라 성저여진에 대해서도 조차 소통부재로 인해 효율적인 통제에 어려움을 겪었다. 따라서 조선과 여진 사이에서 향도적 역할을 주도적으로 수행한 동청례의 활동은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목차

국문초록
Ⅰ. 머리말
Ⅱ. 童淸禮의 가문적 배경
Ⅲ. 童淸禮의 대여진 외교활동
Ⅳ. 童淸禮의 죽음과 대여진정책의 변화
Ⅴ.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

참고문헌 (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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