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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저널정보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민족문화연구 민족문화연구 제81호
발행연도
2018.1
수록면
201 - 234 (34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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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1719년에 기해통신사의 부사로 일본에 다녀온 황선의 사례를 통해 조선후기 통신사행 참여가 관직생활에 미친 영향을 살펴보았다. 황선은 1710년 과거 급제를 통해 벼슬길에 나아갔으며, 초기에는 주로 중앙부서의실무직에 근무하였다. 그런데 ‘專對’ 능력을 인정받아 38세의 젊은 나이로 1719년의 기해사행 통신부사 직무를 수행하게 되면서 그의 관직은 고속 승진을 하였다. 통신사행에 참여하기 전 황선의 관직은 통신부사에 부합하지 않는 낮은 직위였으나, 사행을 떠나기 전 2개월에 걸쳐 여러 차례의 관직 제수를 통해 통신부사 임무를 수행하기에걸맞는 종3품 관직인 세자시강원 보덕에까지 올랐다. 10개월에 걸친 통신사행을 다녀온 후에는 다시 그 노고에 대한 치하의 의미로 당하관 최고위 품계로 資窮이라고 일컫는 통훈대부를 거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국왕의 특지에 해당하는 備忘記를 통해 당상관인 통정대부에 오르고, 국왕을 측근에서 모시는 승정원 승지에 제수되었다. 황선은 보통 2, 30년이 걸려도 오르기가 쉽지 않은 당상관직을 통신사행 참여로 인해 관직생활을 시작한 지 10년 만에 제수 받았다. 이후 황선은 경종이 즉위하자 세자시강원에 근무했던 인연으로 다시 승지가 되었으나, 3년여 유배생활을 하는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반면에 영조 초에 이르면 가선대부로 승진하고 재상급 관료가 되었으며, 경상도관찰사에 제배되었다. 그러나 1728년(영조 4)에 발발한 무신란에서 경상도 지역의 난을 토벌한 직후 47세의 나이로 군중에서 갑자기 죽었다. 황선의 卒逝에 대해서는 당대는 물론 후대에도 의혹이 분분했으며, 그의 사후 녹훈에 대해서도 논란이 있었다. 그러나 마침내 황선은 좌찬성에 증직되고, 忠烈이라는 시호를 받았으며, 후손들도 녹용될 수 있었다. 한편, 경상도 지역민들에 의해 황선의 훈적을 기리는 사우 愍忠祠가 세워졌는데, 이 사우는 중앙 조정의 정국동향과 서원정책에 따라 훼철과 복원이 진행되기도 했다. 황선의 관직생활을 사례로 선택하여 자세히 검토해본 결과, 일본통신사의 통신부사경력이 그의 승진에 큰 도움이 되었으며, 국왕을 측근에서 모신 직무가 관직생활의 진퇴에 미친 영향도 확인할 수 있었다. 또한 조선후기 관원의 관직생활을 재구성할 때, 『승정원일기』가 유용한 자료로 활용될 수 있음을 입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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