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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널정보
고려대학교 역사연구소 史叢(사총) 史叢(사총) 제90호
발행연도
2017.1
수록면
1 - 42 (42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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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에서는 고려시대 화폐제도 변화와 그 기간 동안 물가산정방식이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살펴보았다. 고려시대의 화폐가 제도적으로 어떻게 변화되어 갔으며, 같은 기간 물가산정의 변화를 살핌으로서 고려시대 화폐유통의 단면을 살피고자 했다. 고려왕조는 우리 역사상 처음으로 금속화폐의 유통을 시도했다. 성종은 동왕 15년에 철전을 유통했고, 숙종은 동왕 7년에 공식적으로 동전을 유통했다. 그러나 두 금속화폐는 모두 유통에 실패했다. 다음 왕인 목종과 예종이 화폐유통이 실패했다 선언했다. 이러한 사실은 물가 관련 사료에서도 잘 나타난다. 고려초에서부터 동전이 유통되던 숙종 때가지 철전과 동전으로 물가가 계산된 기록은 전혀 없다. 이는 실제도 시장에서 두 화폐의 역할이 매우 제한적이었음을 보여준다. 반면에 금속화폐 주조 이전처럼 물가기록은 米와 布의 교환 비율로 서술되었다. 반면 숙종 6년에 표인되어 유통되었던 은병은 조금 다르다. 은병은 시장에서 은의 가치대로 유통되던 일종의 물품화폐였던 것을명목가치를 부여해 국가에서 직접 주조하고 유통함으로써 법정화폐에 편입한 것이다. 은병제도는 충혜왕 원년에 소은병제를 실시할 때까지 큰 제도적 변화없이 유통되었다. 그래서인지 예종의 후사인 인종 10년의 기사에서는 물가산정시에 제일 먼저 은병을 기준으로 미곡의 가치를 계산하였다. 그리고 충혜왕 원년까지의 물가산정에서는 은과 은병이 기준이 되어 미곡의 가치가 계산되었다. 이전까지 布와 米의 교환가치를 기준으로 계산되었던 물가산정방식이 은 혹은 은병이 포함되는 구조로 바뀌었던 것이다. 특히 원간섭기였던 고려 후기에는 원의 지폐인 보초까지 유입되어 고려화폐 유통에 변화가 생겼지만, 은병제도는 계속 유지되었고 물가산정 방식도 은병 혹은 은과 米혹은 布의 교환비율로 산정되었다. 다만 은의 해외 유출과 보초의 유입은 은가에 큰 영향을 미쳤고, 이에 따라 가치가 보다 작은 소은병제도가 충혜왕때에 등장하였다고 생각된다. 하지만 공민왕대에 이르면 이전 시기보다 은가가 무려 3배 이상 등귀한 상태에서 은병을 기준으로 하는 기존의 화폐제를 유지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던 듯하다. 여기에 대해서는 후에 자세히 살피겠지만, 결국 공민왕대에는 은전 주조 논의가 있었지만 실패했고, 그 뒤에는 저화 유통 논의도 있었지만 실패하고 말았다. 기존의 은병제도도 없어지고, 새로운 화폐제도는 논의에만 그치던 이 시기에는 물가산정 방식도 변화하였다. 바로 布대 米의 교환가치를 계산하는 방식으로 변화된 것이다. 이 당시는 실질적으로국가가 유통하던 화폐가 없던 시기였던 고려 전기와 마찬가지로물가산정 방식이 布대 米로 표현되었다. 다만 고려 전기에는 다양한 포의 종류와 다양한 곡물이 언급되었던 것에 반해 이 당시는간결하게 布와 米로만 표현되었다. 다양한 종류가 아니라 한가지로 통일되었다는 것은 이들 물품화폐가 단일품목으로 가치 표준이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는 물품의 화폐화 과정에서 빼놓을 수 없는과정이기도 하다. 정리하자면 고려시대는 시기에 따라 조금 다르지만, 米와 布중 심의 물품화폐와 금속화폐인 은병, 칭량화폐인 은, 원간섭기 외부에서 유입된 원의 寶鈔등 다양한 화폐가 공존하며 유통되던 시기였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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