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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최은진 (국사편찬위원회)
저널정보
한국사학회 사학연구 사학연구 제142호
발행연도
2021.6
수록면
117 - 161 (45page)
DOI
10.31218/TRKH.2021.6.142.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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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엽사는 식민지 조선에서 일본인 대지주들이 공동 경영하던 전형적인 식민지 농업회사였다. 이엽사는 식민지 조선의 농업 증산과 일본으로의 미곡 등 농산물 이출 활성화를 위해 농사개량에 힘쓰는 등 식민당국의 농업정책에 적극적으로 따르면서 당국의 지원을 받고 있었다. 그 결과 이엽사농장은 식민지지주제에서 필연적이던 소작문제 중 하나로 고율의 소작료 문제를 안고 있었다. 식민지지주제하에서 지주들은 대체로 고율의 소작료를 거두어 그 농산물의 많은 양을 시장에 내다 팔았고, 그것이 무역업자에 의해 일본으로 실려 가는 구조적 수탈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이엽사농장의 소작료율은 무려 6~8할 이상에 달할 만큼 가혹했는데, 그 혜택은 지주와 식민당국이 향유한 반면에 피해는 고스란히 소작농민들에게 돌아가 생존권을 위협할 정도였다.
이에 1927년 옥구농민조합 서수지부의 간부 장태성, 김행규 등이 주축이 되어 옥구 이엽사농장 소작쟁의를 일으켰고, 이는 자연히 항일운동이자 독립운동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옥구농민조합 서수지부의 조합원 대부분은 농민으로 그 수가 200여 명에 달했는데, 이들을 포함하여 이엽사 서수농장의 소작인 대다수인 300여 명 이상이 소작쟁의에 자발적으로 참가한 점이 눈에 띈다. 그런데 식민당국은 즉시 경찰을 앞세워 관계자들을 대검거했고, 검사에 의해 전주지방법원 군산지청 최초로 많은 피고 34명이 기소되었으며, 법원에서 이 모두가 유죄 판결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일본인 대지주를 비호하여 자행된 식민당국의 강력한 탄압이 역설적으로 이에 항거한 조선인 소작농민들에 의해 기념비적인 농민운동을 낳은 것이다.
또한 농민들은 조직적으로 움직였다. 애초에 고려공산청년회의 지시로 옥구농민조합이 소작쟁의를 일으킨 점에서, 옥구 이엽사농장 소작쟁의는 식민당국의 탄압을 거세게 받으며 독립운동으로 발전했을 뿐만 아니라 이미 초기부터 계획적으로 독립운동의 성격을 띠고 전개되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소작쟁의가 일어난 후 이 지역 노동단체와 청년단체 등 각 사회단체가 연대하여 사건 진상조사와 문제 해결, 참여자 지원을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일본 도쿄에까지 옥구 이엽사농장 소작쟁의의 소식이 전해지면서 심재순 등이 농민조합을 확충해서 일본제국주의의 정치적 압박과 경제적 착취에 대항하여 그로부터의 해방을 도모하려 하며 격문을 배포하는 등 이후 이 지역에서 공산주의운동이 이어졌다.

목차

요약
머리말
Ⅰ. 옥구 이엽사농장 소작쟁의의 전개
Ⅱ. 식민당국의 탄압과 독립운동으로서 소작쟁의의 영향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

참고문헌 (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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