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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남정호 (경북대학교)
저널정보
전북사학회 전북사학 전북사학 제53호
발행연도
2018.1
수록면
105 - 136 (32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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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660년 나당연합군의 공격에 직면하여 의자왕이 주재한 방어전략 회의에서 제시된 백제의 방어 전략을 살펴보고, 실제 전개된 황산벌 전투, 기벌포(웅진강구) 전투, 사비성 남쪽의 전투를 백제의 방어 전략에 맞추어 분석한 것이다. 먼저 백제에서는 기본적인 사비도성 방어 체제가 갖추어져 있었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1차 방어선은 탄현과 기벌포, 2차 방어선은 진현성 등의 대전 동부 지역의 산성들과 가림성, 3차 방어선은 사비성의 나성과 부소산성으로 파악하였다. 백제의 방어 전략 회의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세 단계로 나누어 보았다. 첫 번째 단계는 나당군의 진격로가 확실하지 않은 상태에서 당군을 먼저 공격하자는 의직의 견해와 신라군과 결전하자는 상영의 견해가 대립하였다. 의자왕은 두 사람에 대한 군사적 믿음이 부족하여 어떤 선택을 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다시 좌평 흥수의 의견을 구하였다. 두 번째 단계에서는 흥수의 견해와 대신들의 견해가 대립하였다. 여기서 최대 논쟁점은 흥수의 제안대로 중앙군을 탄현과 백강에 파견하여 신라군과 당군을 막으면서 농성을 통한 장기전으로 가느냐, 아니면 대신들의 견해처럼 중앙군을 중심으로 빠른 시일 내에 승부를 결정짓느냐의 문제였다. 당시 백제는 태자 융을 지지하던 세력이 쇠퇴하고 소왕 효를 따르는 세력이 우세해지면서 양 세력 간의 대립이 지속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 후자에 속하는 대신들이 흥수의 의견이 채택되어 전자의 세력이 확대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고, 중앙군을 탄현과 기벌포로 파견하여 장기전을 치루는 것은 정변의 위험이 있었기 때문에 선택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이런 논의가 지속되는 과정에 이미 신라군과 당군은 지방군이 방어하던 탄현과 기벌포를 통과해버렸다. 세 번째 단계에서는 어쩔 수 없이 중앙군 일부를 황산벌로 파견하여 신라군의 진격을 막고 나머지 병력은 사비성을 지키면서 당군의 공격에 대비하도록 하였다. 실제 신라군과 당군을 막기 위해 펼쳐진 방어 전투를 살펴보면, 황산벌 전투는 1차 방어선인 탄현과 2차 방어선인 대전 지역마저 통과한 신라군을 저지하기 위해 중앙군인 계백의 5천 결사대를 파견하여 개태사 일대에서 막고자 한 것이었다. 기벌포(웅진강구) 전투는 해로로 공격한 나당군을 막기 위한 전투였는데, 백제군의 방어선을 교묘히 피해 웅포 일대에 상륙한 나당군이 백제군의 공격을 물리치고 강경 일대와 군산 방면의 양 쪽으로 진격한 것으로 보았다. 사비성 남쪽에서의 전투에서는 당군이 사비성 남쪽 지역에 이르자 백제군은 신라군이 합류하기 전에 중앙군과 주변 지방군을 총동원하여 당군에 대한 대공세를 펼쳤으나 1만여 명이 죽거나 사로잡히는 대패를 당하고 말았다. 이렇게 되자 사비성 방어 병력이 부족해져 의자왕은 웅진성으로 피신하였고, 결국 사비성은 쉽게 함락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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