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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이지선 (숙명여자대학교)
저널정보
국립국악원 국악원논문집 국악원논문집 제31호
발행연도
2015.6
수록면
145 - 190 (46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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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에서는 1907년부터 1915년까지의 『경성신보』 및 『경성일보』 기사 중 경성 소재 일본인 경영 극장의 공연 기사를 분석하여, 20세기 초 조선에서의 일본 전통공연예술의 양상에 대해서 파악했다. 『경성일보』와 『경성신보』에서 확인되는 경성 소재 일본인 극장은 16곳이다. 이중 일본 전통예술을 공연한 극장은 수좌?가무기좌?경성좌?용산좌?본정좌?영락정?낭화관?어성좌?좌구량좌?수관?유락관의 11곳으로, 이중 낭화관?수좌?가무기좌?영락정은 다른 극장에 비해 공연 횟수가 압도적으로 많다. 일본 전통공연은 1907년부터 1910년까지 계속 증가하다가 1911년부터 1912년까지는 감소, 그리고 1915년에는 다시 증가하는 형태로 나타난다. 특히 1910년에 공연 횟수가 크게 늘어난 것은 경성 거주 일본인의 증가와 함께 극장 수가 증가한 것과 관련이 있다고 할 수 있다. 1911년과 1912년은 경성의 일본 흥행시장의 침체기로, 이를 극복하려는 노력이 있었지만 쉽게 경기를 회복하지는 못한 것으로 보인다. 1915년에 공연 시장이 활기찼던 이유는 조선물산공진회 개최의 영향으로 이해된다. 1907년부터 1915년까지의 경성에서 가장 빈번하게 접할 수 있던 일본 전통공연은 나니와부시이고, 이어서 가부키-라쿠고-기다유-고단-겐지부시의 순이다. 이는 당시 일본에서 나니와부시가 유행하고 있었던 것과 같은 현상이다. 또한 경성에서는 일본의 유명 연주자의 공연을 자주 접할 수 있었던 것으로 확인되는데, 이러한 점은 일본과 경성의 공연 문화가 큰 시간차를 두지 않고 같은 형태로 전개되고 있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경성에 일본인 경영 극장이 조선인 경영 극장보다 월등히 많았던 이유는 전근대부터 시작된 일본의 관극문화가 경성의 일본 거류민사회에까지 이어졌기 때문이라 판단된다. 일본인 극장 공연 중에는 조선의 전통공연은 찾아볼 수 없는데, 이는 한국어를 사용하는 공연(조선 신파, 조선 전통예술)과 일본어를 사용하는 공연(일본 신파, 일본 전통예술)이 각각 조선인 경영 극장과 일본인 경영 극장으로 분명하게 구분되어 행해졌다는 것을 보여준다. 조선인 극장에는 공연을 전담하는 전속 예인이 소속되어 있었던 데 비해, 일본인 극장에는 전속 음악가가 따로 있지 않았고 공연을 위해 일본에서 연주자를 부르는 경우가 많았다. 극장의 공연 종목 차이는 조선인 극장의 경우 소속된 음악가들의 전문 분야에 의한 것인 반면에 일본인 극장의 경우는 극장의 규모와 성격에서 기인한 것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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