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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키워드
〈풍요〉는 선덕여왕 4년(635)에 승려 양지가 영묘사의 장육존상을 조성할 때 이를 도운 민중들이 부른 노래이다. 이에 본고는 선덕여왕 당시의 정치 상황과 불교, 선덕여왕과 승려 양지와의 관계들 속에서 〈풍요〉가 갖는 의미를 찾고자 하였다. 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풍요〉에 대해서 불교와 무관한 노동요라는 견해가 있지만 이 노래가 불상을 조성할 때 불린 노래이고, 불상 조성자인 양지가 깊이 관여되었다는 점에서 이 노래는 양지와 불교적 사유가 어느 정도 관계를 맺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영묘사의 장육상 조성이 선덕여왕 대의 중요 불사(佛事)인 점을 생각하면 이 노래가 선덕여왕과도 연관성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선덕여왕 대는 삼국 간 긴장이 고조되던 시기로 선덕여왕이 즉위한 이후부터 고구려와 백제로부터 끊임없는 군사적 공격을 받았다. 게다가 ‘여성’ 군주가 갖는 한계는 이러한 위기 상황을 극한에 이르게 하였다. 당 태종의 꽃씨 선물에 담긴 희롱, 대리 통치 요구와 대내적으로 비담과 염종의 반란 등이 그것이다. 따라서 선덕여왕은 당대 긴장된 동아시아 정세 속에서 축적된 위기의 유산과 여성 군주로서의 한계를 가졌던 군왕이라 할 수 있다.
여왕은 이러한 위기와 한계를 ‘불교치국책’으로 극복하려 했다. 법흥왕 때부터 이어온 왕권강화로 작용한 불교이념을 여왕 대에도 적극 활용하였던 것이다. 분황사ㆍ영묘사ㆍ황룡사탑 준공, 백고좌회, 대당 자장 파견 등을 통해 초전불교시대의 유풍을 안착시키면서도 새로운 불교 이념의 수입으로 왕실 안정과 호국(護國)을 도모했던 것이다.
양지는 평민층 출신으로 선덕여왕 대에 활동한 조불사(造佛師)였다. 그는 종교성과 예술성을 갖춘 인물이라 할 수 있다. 그의 행적과 유품에서 밀교적성격을 찾을 수 있으나 일부 작품에서 새로운 기법이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재래의 기술과 신기술을 자유롭게 구현할 수 있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이런 사상과 재주는 영묘사의 장육상 조성 책임자로 선정될 수 있었으며 선덕여왕과 관계를 맺을 수 계기가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풍요〉는 자체만 놓고 보면 민중들이 윤회의 고통을 벗어나기 위해 공덕을 쌓는 노래라 할 수 있다. ‘오다’, ‘서러움’, ‘많다’ 그리고 ‘공덕’ 등이 서로 의미를 주고받으면서 노래를 전개하고 있는 바, 현재의 ‘서러움’은 과거 업(業)의 결과요, ‘많음’은 괴로움의 깊이이자 그런 고통을 안고 있는 무수한 중생을 가리키며 ‘공덕’은 업을 끊기 위한 수행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오다[來如]’는 겉으로는 고통과 번민에 있는 중생의 윤회를 보여주고 있으면서도 속으로는 그들이 미래의 ‘여래(如來)’로 향하고 있음을 암시한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풍요〉를 신라 상대 선덕여왕 대의 정치불교적 관점과 막대한 비용된 투입된 불상 제작의 의도에서 보면 단순히 업설에 기초한 불교관념의 노래로만은 볼 수 없다. 국가에 대한 민중의 조세 저항과 정치적 비판을 잠재우기 위해 신라를 불국토로 위장하고 강제 납세를 자발적 시주로 공작하면서 정치적 복종을 이루는 과정에서 〈풍요〉는 그 소임을 다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풍요〉는 선덕여왕이 대내적 위기 상황과 ‘여왕’으로서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불교를 활용하는 과정에서, 영묘사의 장육존상 조성과 그 사업을 수행하는 양지를 통하고 민중의 정치적 경제적 저항을 없애기 위해 만들어진, 정치적 교화의 불교가요라 할 수 있다.
상세정보 수정요청해당 페이지 내 제목·저자·목차·페이지〈풍요〉에 대해서 불교와 무관한 노동요라는 견해가 있지만 이 노래가 불상을 조성할 때 불린 노래이고, 불상 조성자인 양지가 깊이 관여되었다는 점에서 이 노래는 양지와 불교적 사유가 어느 정도 관계를 맺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영묘사의 장육상 조성이 선덕여왕 대의 중요 불사(佛事)인 점을 생각하면 이 노래가 선덕여왕과도 연관성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선덕여왕 대는 삼국 간 긴장이 고조되던 시기로 선덕여왕이 즉위한 이후부터 고구려와 백제로부터 끊임없는 군사적 공격을 받았다. 게다가 ‘여성’ 군주가 갖는 한계는 이러한 위기 상황을 극한에 이르게 하였다. 당 태종의 꽃씨 선물에 담긴 희롱, 대리 통치 요구와 대내적으로 비담과 염종의 반란 등이 그것이다. 따라서 선덕여왕은 당대 긴장된 동아시아 정세 속에서 축적된 위기의 유산과 여성 군주로서의 한계를 가졌던 군왕이라 할 수 있다.
여왕은 이러한 위기와 한계를 ‘불교치국책’으로 극복하려 했다. 법흥왕 때부터 이어온 왕권강화로 작용한 불교이념을 여왕 대에도 적극 활용하였던 것이다. 분황사ㆍ영묘사ㆍ황룡사탑 준공, 백고좌회, 대당 자장 파견 등을 통해 초전불교시대의 유풍을 안착시키면서도 새로운 불교 이념의 수입으로 왕실 안정과 호국(護國)을 도모했던 것이다.
양지는 평민층 출신으로 선덕여왕 대에 활동한 조불사(造佛師)였다. 그는 종교성과 예술성을 갖춘 인물이라 할 수 있다. 그의 행적과 유품에서 밀교적성격을 찾을 수 있으나 일부 작품에서 새로운 기법이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재래의 기술과 신기술을 자유롭게 구현할 수 있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이런 사상과 재주는 영묘사의 장육상 조성 책임자로 선정될 수 있었으며 선덕여왕과 관계를 맺을 수 계기가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풍요〉는 자체만 놓고 보면 민중들이 윤회의 고통을 벗어나기 위해 공덕을 쌓는 노래라 할 수 있다. ‘오다’, ‘서러움’, ‘많다’ 그리고 ‘공덕’ 등이 서로 의미를 주고받으면서 노래를 전개하고 있는 바, 현재의 ‘서러움’은 과거 업(業)의 결과요, ‘많음’은 괴로움의 깊이이자 그런 고통을 안고 있는 무수한 중생을 가리키며 ‘공덕’은 업을 끊기 위한 수행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오다[來如]’는 겉으로는 고통과 번민에 있는 중생의 윤회를 보여주고 있으면서도 속으로는 그들이 미래의 ‘여래(如來)’로 향하고 있음을 암시한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풍요〉를 신라 상대 선덕여왕 대의 정치불교적 관점과 막대한 비용된 투입된 불상 제작의 의도에서 보면 단순히 업설에 기초한 불교관념의 노래로만은 볼 수 없다. 국가에 대한 민중의 조세 저항과 정치적 비판을 잠재우기 위해 신라를 불국토로 위장하고 강제 납세를 자발적 시주로 공작하면서 정치적 복종을 이루는 과정에서 〈풍요〉는 그 소임을 다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풍요〉는 선덕여왕이 대내적 위기 상황과 ‘여왕’으로서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불교를 활용하는 과정에서, 영묘사의 장육존상 조성과 그 사업을 수행하는 양지를 통하고 민중의 정치적 경제적 저항을 없애기 위해 만들어진, 정치적 교화의 불교가요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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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 【국문초록】
- 1. 서론
- 2. 선덕여왕 대의 위기와 한계
- 3. 위기 극복을 위한 여왕의 모색
- 4. 모색의 결과
- 5. 결론
- 참고문헌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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