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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립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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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대학교 인천학연구원 인천학연구 인천학연구 제30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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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록·키워드

    이 글은 일제강점기 조선의 주택난을 인천의 사례와 조선대가조합령을 통해 살피는 실증적 연구이다. 조선대가조합령은 전시체제기에 일제가 도시의 주택난 해결을 위해 내놓은 마지막 주택관련 법령으로 지금까지 주목받지 않았는데, 이 글에서 처음 조명했다. 또한 귀속재산불하서류를 통해 극심한 주택난에도 일본인과 일본인 대가업자들이 다수의 주택을 보유하고 있었음을 규명했다.
    한국 사회의 주택난은 1920년대에 시작되어 1930년대에는 전 도시의 문제가 되었다. 인천의 주택난은 이때 시작되었다. 그 원인은 일제의 공업화정책에 있었다. 도시 주변에 공장들이 세워지면서 노동인구의 유입이 급속히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또 중일전쟁으로 전선이 확대되면서 물자부족과 배급의 불원활, 자금난 등으로 주택난은 더 극심해졌다. 건축자재는 중요 군수물자이기도 했기 때문에 가옥의 신축은 물론 증개축과 보수·수선도 수월치 않았다. 주택난은 지대와 가임 폭등으로 이어졌고, 이는 곧 생활난이 되었다.
    일제와 조선총독부는 심화되는 주택난에 ‘무대책’으로 일관했으나, 주택난에 따른 생활의 불안정이 군수물자 생산·보급의 부진으로 이어지자 1939년 총독부 안에 주택대책위원회를 설치하는 한편 지대와 가임을 고정하는 통제령을 발동했다. 주택관련 법령도 만들었다. 1941년의 조선주택영단령과 1942년의 조선대가조합령이다. 대가조합령은 민간 대가조합을 법인화하여 도지사의 통제·감독 아래 두어 가임을 적절히 받게 하되, 건축자재와 자금 등을 계획화하여 필요에 따라 할당함으로써 가옥의 신축과 증개축 등을 원활히 한다는 것이었다.
    인천부대가조합은 1942년 10월 19일 법인으로 등기 설립되었다. 대가조합 임원은 13명으로 대가업자 외에 상업·제조공업 등을 운영하는 사업가들로 구성되었다. 1938년 말경 인천의 대가업자는 160명이었으며, 그들 중에는 부회의원으로서 부정에 간여한 사람도 있었다.
    1945년 8월 해방 후 일본정부와 일본인들의 재산은 미군정에 귀속되었다가 3년 뒤 대한민국의 국유재산으로 돌아왔다. 국가기록원에 존안된 인천의 국유재산불하서류는 5,000~7,300여 건이다. 필자가 수집 정리한 인천 중앙동과 송학동의 국유주택불하서류 증 330건은 주택(대지와 점포 포함)이고, 전 일본인 소유자는 144명이었다. 인천부대가조합 임원 4명이 그 중 33채(10%)를 소유했고, 2채 이상 소유자 59명이 246채(74.5%)를 소유하고 있었다. 또 시가지계획으로 송현동과 화평동에서 조선인 가옥 900여 호가 헐려 나갔는데, 그 2개동의 국유재산불하서류는 1,961건으로 헐려나간 가옥의 두 배가 넘었다. 극심한 주택난에도 불구하고 일본인과 일본인 대가업자들은 다수의 가옥을 소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바탕에는 일제와 총독부 당국의 ‘무대책’한 주택정책과 대가조합에 대한 ‘특혜’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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