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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광역시립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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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미술사교육학회 미술사학 美術史學 第51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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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록·키워드

    출가를 결심한 싯다르타 태자가 카필라성을 떠나 고행림에 이르러 애마 칸타카, 마부 찬타카와 헤어지는 순간이 ‘애마별리(愛⾺別離)’이다. 이 사건을 모티프로 하여 만들어진 애마별리상은 인도 간다라에서 처음 만들어져 중국으로 전해졌고, 북위-동위-북제 시기에 걸쳐 유행하였다. 이 글은 종교 미술이 종교 경전의 규정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롭고 또 미술의 변화가 독자성을 가진다는 전제하에 중국 애마별리 도상의 형성과 변화 과정을 고찰한 것이다.
    중국 특유의 애마별리 도상 형상과 변화의 단서는 인도와 달리 중국의 싯다르타 태자가 “반가의 자세로 앉아 사유” 한다는 점에 있었다. 싯다르타가 ‘별리’의 순간에 앉아서 사유하자 서 있는 싯다르타를 중심으로 배치되었던 애마 칸타카, 시종 찬타카 구도에 부조화가 생겼다. 말은 먼 길을 떠나려는 싯다르타의 서 있는 발을 핥을 수 없었고, 시종은 세속의 옷을 벗어 건네는 싯다르타로부터 받아 들 물건이 없어진 것이다. 이같은 부조화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중국 특유의 애마별리상이 만들어졌다.
    새로운 애마별리상이 만들어지자 중국인들은 이를 변화시키기 시작하였다. 가장 쉬운 방법은 반가사유한 싯다르타에게 곡수(曲樹)를 드리우는 것이었다. 곡수는 싯다르타가 나무 아래에서 첫 선정에 들었다는 수하사유(樹下思惟) 이야기의 핵심 요소였다. 애마별리 장면에서도 싯다르타가 반가사유하게 되자 내적 연상에 의해 덧붙을 수 있었던 것이다. 한편 중국인들은 싯다르타가 성불하는 의미 있는 순간에 동참하고 싶은 마음도 생겼다. 그들은 싯다르타 옆에 공양자상을 삽입하고 여기에 망부나 망모의 이름을 새겨 넣었다. 이것은 내적 연상과는 또 다른 외적 원망의 각인 방식이었다. 이러한 논리의 연장선상에서 본다면, 곡수나 공양자상이 동반 출현하거나, 수하사유 장면과 애마별리 장면이 싯다르타를 매개로 결합하는 것도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모든 일은 애마별리 순간에 싯다르타가 반가사유하면서 시작되었다. 중국인들은 왜 이별의 순간에 싯다르타를 “앉아서 사유”하게 만들었을까?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확실한 점은 고대 중국인들이 애마별리 순간의 싯다르타 태자의 모습을 ‘반가사유’ 자세로 고정시켰고, 여기에 곡수와 공양자상 등 새로운 요소들을 덧붙여 중국 특유의 애마별리상을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이것이 중국 고유의 애마별리상이 형성되고 변주하는 과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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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CI(KEPA) : I410-151-26-02-0963511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