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 내서재 .. 알림
소속 기관/학교 인증
인증하면 논문, 학술자료 등을  무료로 열람할 수 있어요.
한국대학교, 누리자동차, 시립도서관 등 나의 기관을 확인해보세요
(국내 대학 90% 이상 구독 중)
로그인 회원가입 고객센터 ENG
주제분류

추천
검색

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정재훈 (서울대학교)
저널정보
한국실학학회 한국실학연구 한국실학연구 제8호
발행연도
2004.1
수록면
299 - 324 (26page)

이용수

표지
📌
연구주제
📖
연구배경
🔬
연구방법
🏆
연구결과
AI에게 요청하기
추천
검색

초록· 키워드

오류제보하기
이 글은 조선후기의 史書에 나타나는 중화주의와 ‘민족주의’에 대해 살펴보는 것이 목적이다. 이를 위해 중화주의, 내지 중화사상은 기자(조선)에 대한 인식의 변화에서 살피고, ‘민족주의’에 관련된 부분은 단군조선의 인식에 대한 변화에서 고찰하였다. 그리고 비교적 중화주의와 ‘민족주의’의 성향이 결합되어 나타났다고 보여지는 修山 李種徽의 東史를 통해 조선후기의 역사의식을 살펴보았다.통상 조선후기의 史學史에서 實學과 관련되어 새로운 요소로서 주목한 것 가운데 하나는 기자로 대표되는 中華主義가 극복되고 檀君으로 대표되는 민족적 요소가 새롭게 등장하였다는 사실을 지적한 것이다. 이러한 인식은 한국의 경우 근대 민족주의가 식민지배에 저항하는 가운데 형성되었다는 사실과 더불어 민족의 시조로서 단군이 극단적으로 주목되는 경향과 관련이 있었다. 곧 箕子는 중국문명, 중화주의의 대표로서 파악되었고, 그에 비해 단군은 중화주의에 상대편에 있는 민족의 한 요소로서 주목되었다.하지만 조선후기의 사서에 나타난 단군과 기자의 모습은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았다. 기자가 중화주의의 대표격으로 선진문화를 대변하는 존재로 이해되는 主潮 아래에는 기자를 중화문화의 일부로만 이해한 것이 아니라 우리 고유문화의 일부로서 받아들인 경향도 함께 있었다. 곧 기자조선으로 대표되는 기자문화는 조선문화의 중요한 구성요소로서 조선 고유문화의 발전을 도모하는 요소로 작용하였다는 인식상의 변화가 자리하고 있었다. 단군조선에 관한 인식도 마찬가지였다. 조선시대에 단군은 혈연적인 시조로서 보편성을 띤 존재라는 인식이 이미 조선초부터 형성되었다. 이렇게 형성된 단군에 대한 인식이 16세기에 사림이 등장한 후 性理學에 몰두하는 분위기 속에서 기자에 밀리는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兩亂을 계기로 하여 단군조선은 새롭게 조명되어 민족적인 위기를 단군이라는 시조를 내세워 극복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이때 새롭게 주목된 단군에 대한 관심 속에는 단군조선의 문화까지 인정하는 형태로 인식이 바뀌게 되었다. 이러한 배경 위에서 李種徽는 단군과 기자조선에 대해 신선한 재구성을 하였던 것이다. 그가 지은 東史에서는 고대사의 檀君과 箕子의 위상을 다시 주목하여 이 때에서야 비로소 단군과 기자가 우리 고대사의 정통에 위치지워지게 되었다. 즉 이전까지 箕子를 한국 역사의 시조로 파악하는 士林계열의 역사의식에서 벗어나서 단군에서 기자로 이어지는 우리 역사의 정통론을 새롭게 자리매김하게 되었던 것이다.東史에서는 檀君本紀와 箕子本紀를 나란히 설정함으로써 단군과 기자를 통합적으로 이해한 측면이 보인다. 중국문화와 동 궤도에서 기자가 문화를 일으킨 것을 평가하고, 기자의 遺風이 고구려에 계승됨으로써 高句麗의 문화가 유교문화를 꽃피웠던 것이라고 했다. 또 고구려는 부여와 함께 檀君族의 혈통을 계승하였으므로 단군의 혈통과 기자의 문화를 동시에 계승한 것이, 고구려를 중심으로 三國史를 인식하게 된 근거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중국문화와 대등한 수준으로 기자와 고구려의 문화를 평가하고, 기자와 단군을 통합시켜 이해할 수 있었던 관점은, 곧 18세기 단계에 이르러서는 중국의 문화를 받아들이면서도 이미 이것을 주체적으로 소화시켜 朝鮮化할 수 있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목차

등록된 정보가 없습니다.

참고문헌 (0)

참고문헌 신청

이 논문의 저자 정보

최근 본 자료

전체보기

댓글(0)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