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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키워드
본고는 1940년대 전반기 중국관내지역의 대표적인 무력단체인 조선의용군과 한국광복군의 인적구성, 상호인식, 대중자주성 등을 비교사적 관점에서 고찰한 논문이다. 1937년 중일전쟁 발발후 중국관내지역의 한인독립운동진영은 본격적인 대일전을 수행하기 위한 국사단체를 조직하였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임시정부의 한국광복군과 팔로군지역의 조선의용군이었다.
광복군은 전민족의 대표를 자임하는 임시정부의 국군으로 창설되었고 의용군은 화북지방의 일개 지방단체를 표방하던 독립동맹 산하의 무장단체였다. 겉으로 상하관계로 보이는 이 둘의 관계는 초기 한때를 제외하고는 사실상 경쟁적 관계에 있었다.
먼저 조선의용군의 구성원들은 김원봉이 양성한 성자군관학교 출신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으며 낙양군관학교나 조선혁명간부학교 출신도 적지 않았다. 낙양군관학교 출신은 김구가 양성하였던 인물들로 후에 의용대의 북상에 가담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김구의 추천으로 낙양군관학교를 다녔던 김학무는 이러한 인연으로 후에 임시정부와 독립동맹을 이어주는 가교 역할을 수행하였다. 군관학교 출신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광복군도 비슷하다. 광복군 간부들은 주로 중국중앙군관학교, 군벌이 운영했던 군사학교 등 중국의 다양한 군사학교를 졸업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의용군은 조직 특성상 무장선전활동과 적구공작을 중시하였다. 광복군은 무엇보다도 국민당정부의 倍都 중경의 이점을 잘 활용하였다. 특히 국제방송을 통한 선전활동은 연합국을 주대상으로 진행하였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영국군, 미군과의 군사합작을 추진하였다. 인면전구공작 대라든가 OSS와의 군사합작은 의용군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것들이다.
처음 의용대는 북상후 화북지대를 결성하고 당분간 중경 대본부와 연락을 유지하면서 지시를 받았다. 그리고 의용군의 상부지도기구인 독립동맹도 임시정부를 중앙으로 봉대하는 입장을 취하였다. 하지만 1943년 이후 중공의 영향이 강화되고 그 대변자 무정이 실권을 장악하면서부터는 독립동맹 및 의용군은 오히려 임시정부를 많은 독립운동단체중의 하나를 평가절하 하였다. 이와 마찬가지로 임시정부나 광복군도 의용군을 ‘奸黨’(중공-필자)에 예속된 존재로 보는 한편 의용군을 광복군 제1지대로 파악하고 지휘대상으로 규정하였다.
광복군은 창설 후 중국국민정부의 정책에 의해 임시정부에서 분리되어 중국군에 예속되고 말았다. 때문에 전민족의 대표를 자임하는 임시정부로서는 광복군의 통수권을 찾아오는데 사활을 걸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결과 광복군의 통수권을 회복한 임시정부의 자주성과 국제적 위상은 높아져 갔다. 이에 비해 의용군은 처음 독립동맹의 지휘를 받는 조직으로 출발했지만, 무정 등 중공의 입장을 대변하는 세력에 의해 독립동맹으로부터 분리되어 팔로군에 예속되었다. 독립운동의 전략과 관련하여 이러한 차이가 생겨나게 된 것은 각각 활동했던 국제적 환경이 달랐고, 그에 따른 국제역학관계나 항일전통도 달랐기 때문이었다.
광복군은 전민족의 대표를 자임하는 임시정부의 국군으로 창설되었고 의용군은 화북지방의 일개 지방단체를 표방하던 독립동맹 산하의 무장단체였다. 겉으로 상하관계로 보이는 이 둘의 관계는 초기 한때를 제외하고는 사실상 경쟁적 관계에 있었다.
먼저 조선의용군의 구성원들은 김원봉이 양성한 성자군관학교 출신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으며 낙양군관학교나 조선혁명간부학교 출신도 적지 않았다. 낙양군관학교 출신은 김구가 양성하였던 인물들로 후에 의용대의 북상에 가담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김구의 추천으로 낙양군관학교를 다녔던 김학무는 이러한 인연으로 후에 임시정부와 독립동맹을 이어주는 가교 역할을 수행하였다. 군관학교 출신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광복군도 비슷하다. 광복군 간부들은 주로 중국중앙군관학교, 군벌이 운영했던 군사학교 등 중국의 다양한 군사학교를 졸업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의용군은 조직 특성상 무장선전활동과 적구공작을 중시하였다. 광복군은 무엇보다도 국민당정부의 倍都 중경의 이점을 잘 활용하였다. 특히 국제방송을 통한 선전활동은 연합국을 주대상으로 진행하였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영국군, 미군과의 군사합작을 추진하였다. 인면전구공작 대라든가 OSS와의 군사합작은 의용군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것들이다.
처음 의용대는 북상후 화북지대를 결성하고 당분간 중경 대본부와 연락을 유지하면서 지시를 받았다. 그리고 의용군의 상부지도기구인 독립동맹도 임시정부를 중앙으로 봉대하는 입장을 취하였다. 하지만 1943년 이후 중공의 영향이 강화되고 그 대변자 무정이 실권을 장악하면서부터는 독립동맹 및 의용군은 오히려 임시정부를 많은 독립운동단체중의 하나를 평가절하 하였다. 이와 마찬가지로 임시정부나 광복군도 의용군을 ‘奸黨’(중공-필자)에 예속된 존재로 보는 한편 의용군을 광복군 제1지대로 파악하고 지휘대상으로 규정하였다.
광복군은 창설 후 중국국민정부의 정책에 의해 임시정부에서 분리되어 중국군에 예속되고 말았다. 때문에 전민족의 대표를 자임하는 임시정부로서는 광복군의 통수권을 찾아오는데 사활을 걸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결과 광복군의 통수권을 회복한 임시정부의 자주성과 국제적 위상은 높아져 갔다. 이에 비해 의용군은 처음 독립동맹의 지휘를 받는 조직으로 출발했지만, 무정 등 중공의 입장을 대변하는 세력에 의해 독립동맹으로부터 분리되어 팔로군에 예속되었다. 독립운동의 전략과 관련하여 이러한 차이가 생겨나게 된 것은 각각 활동했던 국제적 환경이 달랐고, 그에 따른 국제역학관계나 항일전통도 달랐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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