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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저널정보
한국고대사학회 한국고대사연구 한국고대사연구 45
발행연도
2007.3
수록면
97 - 131 (35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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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증왕(500~514)은 소지왕의 失政을 명분으로 삼아 즉위하였다. 소지왕은 신라 중앙왕실과 결연되어 있는 고타군 노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날이군 파로의 딸 벽화와 혼인하였다. 그런데 이는 소지왕이 ‘친고구려세력’과 제휴하려 한다는 오해를 불러일으켜 폐위의 빌미를 제공하였다. 다만 지증왕이 군사 쿠데타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동원한 것은 아니었다. 지증왕이 즉위 4년(503)까지 갈문왕호를 칭한 채 즉위의례를 거행하지 않았던 것은 소지왕의 죽음과 장례기간 3년을 고려한 결과였다. 지증왕은 비정상적으로 즉위한 데 따른 왕권의 정통성 결여를 절차적 의식으로써 만회하고자 하였다.
지증왕의 집권을 도운 세력으로는 왕비족의 반열에 오른 박씨세력이 우선적으로 꼽힌다. 지증왕은 즉위 전 이미 박씨 연제부인과 혼인하였고, 즉위 후에도 모량부 상공의 딸을 후비로 맞아들였는데 역시 박씨였다. 또한 고타군 노구로 대표되는 지방세력도 지증왕 지지세력의 한 축을 담당하였다.
지증왕은 재위 5년(504)에 파리성 등 12성을 쌓아 대고구려 축성사업을 마무리하였다. 지증왕은 특히 고구려와의 각축장이었던 동해안 일대의 방어망 구축에 주력하였다. 그 결과 재위 13년(512)에는 이사부로 하여금 우산국을 복속케 함으로써 동해안의 제해권까지 장악하였다. 대고구려 방위체계를 완비한 신라는 고구려와의 관계에서 안정적인 우위를 점하게 되었다. 이 때문에 고구려는 공격의 대상을 백제로 바꾸었다.
6세기 초반~중반까지 삼국관계는 고구려대 백제의 각축 국면으로 변화되었다. 나제관계 역시 동맹이 여전히 유효하였지만 이전과 달리 점차 이완되어 갔다. 5세기 말~6세기 초 삼국관계가 변화된 것은 각국 지배세력이 교체되면서 대외인식 역시 변화되었기 때문이었다. 나제관계의 변화와 고구려와 백제중심의 각축전 양상은, 신라의 입장에서 대내적인 체제정비에 주력할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해 주었다.

목차

국문초록
Ⅰ. 머리말
Ⅱ. 智證王의 집권과정과 지지세력
Ⅲ. 對高句麗 防衛體系의 확립과 三國關係의 변화
Ⅳ. 맺음말
〈부록〉 5세기 중반~6세기 중반 삼국관계
참고문헌
Abstract

참고문헌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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