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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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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정보
저널정보
한국문화사학회 문화사학 文化史學 第21號
발행연도
2004.6
수록면
995 - 1,010 (16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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梅泉 黃玹(1855~1910)은 유학 교육을 받고 성장하여 향촌 사대부로서의 삶을 살았던 인물이다. 그는 한국 사회가 국내외적으로 심각한 위기 상황에 직면하고 있었던 시기를 살면서 이미 효용성을 상실한 성리학적 유교 이념의 대안을 찾기 위하여 고심하였고, 외세 특히 일본에 대한 강한 저항 의식을 드러내었다.
新學問에 대한 황현의 관심은 1894년 이후 청ㆍ일 전쟁과 갑오경장 등을 경험하면서 외세의 침략적 성격에 대하여 보다 명확하게 인식하게 되고, 종래의 우리 학문으로는 외세에 대항할 수 있는 힘을 제대로 기를 수 없다는 한계를 느끼게 되면서 점차 고조되었으나 아직 東道西器的인 관점에서 벗어난 것은 아니었다.
1890년대 중엽 이후 동도서기적 관점에서 신학문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하였던 황현의 신학문 수용에 대한 관심과 열의는 1905년 이후 크게 고조되었다. 황현은 1905년의 乙巳勒約 체결, 1907년의 軍隊解散 등을 경험하면서 외세 특히 일본의 침략적 성격을 보다 명확하게 인식하게 되었다. 그는 서양 열강의 침략적 성격에 주목하기보다는 일본의 식민지화 또는 강점 기도가 구체화하고 있었던 우리나라가 의지하고 이용할 수 있는 대상으로 서양 열강을 인식하였다. 그리하여 서양의 학문 즉 신학문의 수용에 대하여 보다 적극적인 자세를 보이게 되었고, 신학문 교육에까지 관심과 열의를 보이게 되었던 것이다.
黃玹은 1907년 사립학교인 ‘壺陽學校’ 설립을 발기하여 다음 해인 1908년 정식으로 개교하였다. 나라와 백성이 패망하지 않으려면 弱肉强食의 상태를 벗어나야 하고, 그 방법은 서양의 富强과 學問을 본받는 것이라고 역설하였던 황현이 호양학교를 설립한 목적은 신학문에 정통한 애국적 인재의 유성이었다.
壺陽學校는 求禮郡 光義面 芝川里에 세워졌다. 그 설립 시기는 일반적으로 1907년 發起, 着工하여 1908년 8월에 開校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1907년 말 경부터 실질적으로 운영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호양학교의 발기인들은 황현의 門人들이 중심이 되었고, 설립과 운영을 위한 재원은 주로 주민들의 출현에 의지하였다. 호양학교의 교육내용에 관한 구체적인 기록은 남아있지 않지만 황현의 신학문 교육에 대한 열의를 반영함과 동시에 항일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방향으로 구성되었을 것이다.

목차

요약
Ⅰ. 序言
Ⅱ. 梅泉 黃玹의 生涯와 思想
Ⅲ. 新學問의 受容
Ⅳ. 私立 ‘壺陽學校’의 設立
Ⅴ. 結語
【Abstra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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