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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학회 한국사학보 韓國史學報 제25호
발행연도
2006.11
수록면
151 - 181 (31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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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나라에서의 동광업의 기원은 금ㆍ은과 더불어 긴 역사를 지니고 있으니, 이미 기원전 1천년경부터 청동기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이어 삼국시대로 들어서면서 장신구ㆍ馬具 중에 금동 제품이 많이 있으며, 통일신라시대에는 거대한 불상ㆍ범종 및 기타 佛具類들이 구리나 청동으로 제작되었음을 볼 수 있다.
고려시대에 들어서서 동이 외국과의 무역, 동전제조, 생활식기, 불상, 동종 등 다양하게 이용됨에 따라 국가는 동소를 중심으로 동을 활발하게 생산하였다. 그러나 구리에서 한단계 발전한 유기는 고려 후기에 와서야 일상화되었다. 고려 때에 동소가 있었음은 확인되나 동광이나 제련유적이나 유구는 확인된 바가 없다. 그런데 최근 경주시 황남동 376 유적에서 동제련용으로 추정되는 도가니가, 경주시 동천동에서 8세기 경의 청동관련 유적이 발견되었다. 이를 통해 고려시대 동제련 과정을 추정할 수 있다.
동의 채굴은 고려 초까지는 노지채굴이었다가 중기부터 본격적으로 갱도를 파서 채굴하는 광산을 개발했다고 생각된다. 광산을 개발하는 일은 소민들을 이용했으므로, 특히 은ㆍ철ㆍ구리 등의 광업에 종사하는 소민들의 고통이 다른 소보다 가장 힘들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같은 고통이 이미 예종대에 유망하는 모습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소의 붕괴는 고려 무신정권기부터 본격적으로 등장하였다. 고려와 몽고와의 30년 전쟁은 소가 해체되는 가장 좋은 기회였다. 그리고 전쟁이나 국가에 공을 세운 소를 군현으로 승격시켜주어 국가가 앞서서 소의 해체에 가담하기도 했다.
고려 말 조선 초가 되면서 이제 국가는 동을 생산하기 위해 일반 민호나 煙戶軍을 동원하였다. 그 과정에서 고려시대 소민의 상당수는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천역 대신 군역에 충당되였지만 특수한 군역에 몰아넣음으로서 일반 양인과 구분되는 身良役賤者가 되었다.
요컨대 고려는 소를 통해 국가에서 광산물을 관장하고 민간에서 구리 채취를 금지하여 동의 생산이 활발하지 않았다. 이것이 원 간섭기에 소가 해체되자 더욱 위축되어 국가에서 필요로 하는 구리를 주로 농한기의 백성이나 군인을 차출하여 채광ㆍ제련하게 하였다. 고려를 이은 조선왕조 또한 국가만 관장하고 동의 사적인 개발을 막아 동의 채굴과 제련이 더욱 부진하게 되어 주로 일본에서 수입하게 되었다.

목차

〈국문 초록〉
1. 머리말
2. 고려시대 동의 종류와 사용실태
3. 동의 제련과 생산지역
4. 소의 붕괴와 동 생산체제의 변화
5. 맺음말
참고문헌

참고문헌 (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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