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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김경옥 (목포대학교)
저널정보
국립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원 도서문화 도서문화 제37집
발행연도
2011.6
수록면
115 - 149 (35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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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19세기 金?의 靈光 荏子島 유배생활을 재구성하기 위해 작성되었다. 분석 자료는 김령의 유배일기인 「艱貞日錄」이다.
김령은 1805년 慶尙道 丹城縣 商山金氏家에서 태어났다. 조선후기 단성의 상산김씨는 유력한 사족가문 중의 하나였다. 그러나 당시 중앙정권은 안동김씨 세도 권력의 전횡아래 있었기 때문에 남인계 지방유생의 관직 진출은 어려웠다. 김령 역시 평생을 이름 없는 선비로 향촌에서 머물렀다. 그의 아들 金麟燮(1827-1903)은 20세에 문과 급제하여 正言에 제수되었으나, 현실에서 관직은 요식적인 자리에 불과하였다. 그리하여 단성의 상산김씨는 양반으로서 향촌 내에서의 위상을 정립하였으나, 경제적으로는 몰락 양반에 불과하였다. 1858년 김령 부자는 관직에 대한 미련을 완전히 버리고 낙향하였다. 이후 김령 부자는 향촌 문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1862년 6월, 김령은 단성민란의 주동자로 진주감옥에 투옥되었고, 동년 7월에 영광 임자도 유배형을 선고받았다.
김령의 유배지에서의 일상은 「주역」 읽기, 「간정일록」 쓰기, 편지쓰기 등이었다. 유배지에서의 의복은 평상복에 미투리를 신었으나, 외출할 때에는 의관을 갖춰 입고, 가죽신을 신었다. 유배지에서의 음식은 방어ㆍ연어ㆍ민어ㆍ공어ㆍ새우ㆍ낙지ㆍ농어 등 어류, 그리고 개와 돼지 등 육류를 섭취한 것으로 확인된다. 김령의 配所는 鎭門 밖에 있는 섬 주민 박윤량 가옥이었다. 유배 초기 김령은 流配人과 鎭屬들을 상대로 임자도 鎭里 일대에서 비교적 단조로운 생활을 하였다. 이후 김령은 유배지에서 심적 안정을 되찾으면서 섬 주민들의 子弟에게 글공부를 가르쳤고, 각 마을의 書齋를 방문하여 서당 훈장들과 교유하였다. 그 결과 김령의 활동공간의 범주는 임자도의 부속도서(작도ㆍ상도ㆍ수도)를 벗어나 점차 지도와 무안 등지로 확대되었다. 이로써 보건대 19세기 김령의 임자도 유배생활은 官의 규제 속에서 엄격히 통제되었다기보다 육지에서 섬으로 추방되어 가족과 고향으로부터 단절된 생활 정도로 평가된다.

목차

[국문초록]
1. 머리말
2. 유배지, 유배인, 그리고 유배일기
3. 김령의 임자도 유배생활
4. 맺음말
참고문헌

참고문헌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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