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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김형수 (한국국학진흥원)
저널정보
한국국학진흥원 국학연구 국학연구 제19집
발행연도
2011.12
수록면
539 - 569 (31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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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공민왕의 즉위과정에서 전개된 정치적 추이와 공민왕 즉위를 지지했던 유자들의 활동과 지향을 살펴본 논문이다.
공민왕대는 원의 지배에서 벗어나 중국대륙과 새로운 외교관계를 정립 하고 고려국정을 쇄신하고자 하던 때였다. 그러나 공민왕의 즉위는 그다 지 순탄한 편은 아니었다. 형이었던 충혜왕이 원에 압송되어 악양에서 사망하였지만 공민왕은 형의 뒤를 이어 즉위하지 못하였다.
충혜왕의 죽음은 그 자신의 도덕적 결함이 크게 중요한 원인이기는 하였으나 원에서 세력을 넓혀가고 있었던 기황후 세력과의 갈등과도 어느 정도 관련이 있었다. 기황후는 충혜왕후 원년(1340) 제2황후에 책봉됨으로써 자정원을 바탕으로 원 황실 내에서 세력을 확충하고, 또 고룡보?박불화 등 고려출신 환관들을 구사하여 조정에까지 영향력을 넓히고 있었다. 기 황후를 배경으로 한 기씨 세력은 이를 바탕으로 고려에서 세력을 키워가고 있었다.
한편 충혜왕은 고려 내에서 독단적이고 무도한 행동으로 많은 원성을 사고 있었으며, 고위 신료들에게는 그다지 신뢰를 주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충혜왕이 체포되었을 때 강융?이능간?권한공 등은 고려왕의 안위보다는 원 황제의 명령을 중시하는 발언을 하고 있었으며, 충혜왕을 구원하기 위한 노력은 이제현?김륜 등 일부에 불과했다.
충혜왕이 원에 압송될 당시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던 고용보는 기황후 측근의 환관으로 원에서도 강력한 힘을 발휘하고 있었으며, 당시 압송되었던 충혜왕을 대신해서 정동행성의 업무를 관장한 것은 기황후의 형제 기철과 원에서 건너온 관료인 홍빈이었다는 점은 당시 충혜왕 제거의 배후가 기황후 및 기씨 세력이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충혜왕 제거 이후 충혜왕의 아들 충목왕이 즉위하였지만, 고려의 정국은 더욱 혼란한 상황으로 접어들었다. 이러한 상황을 맞아 고려의 유자들은 좀더 유능한 군주를 통한 ‘정상적인 국정운영’을 요구하고 있었다. 고려 유자들이 공민왕을 지원하게 된 배경에는 이들의 현실인식이 자리잡 고 있었다. 이제현과 이곡은 충혜왕 이후 고려의 국정운영을 정상적인 상황은 아니라고 파악하고 있었다. 그 결과 이들은 충목왕 서거 후 공민왕 옹립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였던 것이다. 이곡의 경우 충정왕대의 고려를 ‘나라가 아니다’라고 까지 극언하였으며, 이제현은 군주와 신료들의 수신을 강력하게 요구하였다.
공민왕이 즉위한 후 유자들은 공민왕에게 큰 기대를 걸었으나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새로운 개혁의 요구와 기씨 세력 등 구세력에 포위된 공민왕은 국정운영과 개혁의 방향을 유자들에게 찾지 않고 무장세력과 속 세와 격리되었던 인물인 신돈에게 찾음으로써 고려 유자들의 기대 방향 과는 어긋난 길을 걸었던 것이다.

목차

요약문
1. 머리말
2. 기황후의 세력강화와 충혜왕의 폐위
3. 고려 유자들의 당대인식과 공민왕 지원
4. 고려유자들의 기대와 좌절
5. 맺음말
참고문헌

참고문헌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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