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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이동언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저널정보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한국독립운동사연구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38집
발행연도
2011.4
수록면
47 - 86 (40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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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일은 함경북도 경원군에서 태어나 고향에서 함경도의 대표적인 유학자 김노규의 문하에서 한학을 수학한 후 1902년 함일학교 사범과를 졸업하였다. 졸업 후 고향에서 10년간 계몽운동과 교육구국운동에 투신하다가 일제가 한국을 강점하자 만주로 망명하였다. 망명 후 왕청현 덕원리에 명동학교를 설립하여 민족교육에 매진하다가 대종교에 입교하였다.
서일은 대종교 제1세 교주 나철로부터 대종교 교리를 전수받고 대종교에 귀의하였다. 특히 서일은 대종교 제2세 교주 김교헌과 함께 만주에서 대종교 교세 확장에 큰 역할을 하였다. 서일이 본격적인 항일무장투쟁에 나선 것은 1911년 이후이다. 그는 북간도로 건너온 대종교인들을 중심으로 1911년 3월 중광단을 조직하고 단장에 추대되었다. 중광단은 1919년 5월 일부 공교도들과 연합하여 대한정의단으로 발전시켜 조직적인 항일무장투쟁을 준비하였다. 이어 대한정의단 총재 서일은 김좌진·조성환등 군사전문가들이 중심이 되어 조직된 길림군정사와 연합하여 대한군정서(북로군정서)로 명칭을 변경하고 본격적인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대한군정서는 1920년 10월 청산리대첩을 승리로 이끌었다.
청산리대첩에서 대패한 일제의 추격을 피해 서일은 대한군정서를 소만 국경지역인 밀산으로 이동시키고 대한독립군·대한국민회 등 10여 개 독립군 단체를 통합하여 대한독립군단을 결성하고 총대로 추대되었다. 자유시참변으로 타격을 입고 밀산에서 재기를 준비하던 중 1921년 8월 26일 수백 명의 토비들의 야습을 받게 되자 다음날인 27일 서일은 독립군 지휘자로서 책임을 통감하고 자결 순국하였다. 서일은 평생을 대종교 정신으로 수도하는 종교인의 자세로 살았고 중광단을 조직하여 항일무장투쟁의 선봉에 서게 된 것도 대종교 투쟁목표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 서일의 항일무장투쟁은 단순히 대일항전을 통한 민족독립을 넘어서 대종교의 이상국가 건설과도 직결된다. 이러한 목표완성을 위해서는 조국광복을 위한 투철한 투쟁정신과 더불어 종교적 완성을 위한 수행과 연구가 반드시 필요하였다. 그리하여 서일은 수전병행의 행동철학을 실천하였던 것이다.

목차

1. 머리말
2. 출생과 성장
3. 대종교에서의 활동
4. 중광단 조직과 항일무장투쟁
5. 청산리대첩과 독립군단 편성
6. 서일의 사망에 대한 재검토
7. 맺음말
참고문헌
국문요약
영문요약

참고문헌 (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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