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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전호태 (울산대학교)
저널정보
부산경남사학회 역사와경계 역사와경계 제81집
발행연도
2011.12
수록면
1 - 27 (27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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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세기 전반 고구려와 일본 사이의 교류가 본격화될 즈음부터 문헌기록에 모습을 드러내는 고구려계 씨족은 7~8세기 일본 문화의 흐름과 관련하여 중요한 존재이다. 고구려계 씨족 가운데 일부는 ‘畵師えし’가 되어 불교미술 및 장의미술 분야에서 큰 활약을 하게 된다. ‘黃文畵師きぶみのえし’ 씨족의 경우, 견당사의 일원이 되어 당 문물의 수입에 앞장서게 되는데, 이는 일본의 새로운 문화적 흐름과 관련하여 주목된다.
고송총과 키토라고분의 벽화는 개별 제재의 선택이나 구성, 표현기법 등에서 고구려적 전통 위에 당 문화의 영향이 더해지면서 제작되었다. 두 유적이 벽화구성에서 고구려나 당에서는 볼 수 없던 새로운 유형을 보여주는 것은 ‘일본적 정체성’을 추구하기 시작하던 단계의 작품인 까닭이다.
유적의 구조나 벽화의 기법 등으로 볼 때, 두 유적을 축조하고 벽화를 제작한 사람들은 고구려계 씨족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아마 두 유적에 잠든 사람들도 고구려계 관료였을 것이다. 여러 가지 측면에서 두 유적은 고구려·일본 양식 벽화고분으로 규정할 수 있다. 그러나 8세기 일본의 과제는 일본적 정체성의 정립, 일본 문화, 일본 양식의 출현이었다. 모국이 백제나 고구려였던 씨족들도 이런 흐름에 적극 동참하였다. 두 유적은 이런 시대적 과제에 대한 고구려계 씨족의 인식과 대응을 잘 보여주는 사례라고 하겠다.

목차

국문초록
Ⅰ. 머리말
Ⅱ. 고구려 문화의 일본 전래
Ⅲ. 고구려-일본 양식 벽화고분의 출현
Ⅳ. 7~8세기 일본문화와 고구려-일본 양식 고분벽화
Ⅴ. 맺음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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