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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강성봉 (성균관대학교)
저널정보
고구려발해학회 고구려발해연구 高句麗渤海硏究 第42輯
발행연도
2012.3
수록면
213 - 245 (33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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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는 지방사회의 수령들을 매개로 간접통치를 시행하였다. 발해는 부(部) 및 촌(村)의 대소 등급을 기준으로 도독과 자사 등의 관직을 내렸다. 물론 관직을 받은 수령도 있었지만 지방사회 속에는 관직을 받지 않은 소규모 부족의 수령들도 여전히 산재하였다. 즉 발해의 지방제도가 정비되는 과정 속에서 지방의 영향력 있는 대수령 및 수령들은 관직을 수여받고 자치권을 행사하였다. 하지만 그 휘하에 있던 다수의 수령들과 영향권에 벗어나있던 수령들도 자치권을 행사하며 산재하였다. 이러한 상황은 발해멸망시기까지 유지가 되었으며, 멸망 후에도 지방사회의 많은 수령들은 부족자치를 행하며 존속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고려전기 양계지역에 산재하고 있던 여진족 도령(都領)의 모습에서도 유추할 수 있었다. 도령은 ‘우두머리’로 표현되는 수령과 같은 어의를 지니며, 그 성격도 유사하기 때문이다.
도령이란 호칭은 940년 무렵, 고려 태조 때부터 이미 사용되었다. 또한 중국왕조가 발해나 말갈·거란 등 북방 주변 종족의 추장에게 부여했던 수령에서 유래하였다. 도령에 관한 초기기록은 강원도 명주나 경북 등 대부분 변방지역에서 발견되었다. 이것은 발해멸망 후 발해 유민의 고려 유입과 무관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고려는 건국과 더불어 멸망한 발해의 유민을 대거 영입함으로써 민족융합정책을 추진하였다. 발해가 멸망하면서 발해유민들은 거란에 포로가 되거나 강제사민으로 끌려간 자들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그 유민의 상당수는 오랜 세월에 걸쳐 고려로 내투하여 흡수·동화되었다. 발해유민들은 고려의 지방곳곳에 이주되어 고려사회 전반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따라서 적어도 고려초기에는 도령이라는 명칭이 재지유력가 혹은 어떤 집단의 수장이나 특수임무를 수행하는 조직의 우두머리를 부를 때 쓰이던 호칭으로 파악된다. 이것은 발해시기 수령이라는 신분적 호칭이 고려에 전이된 것으로 생각된다. 특히 고려초기 사서에 나타난 도령들은 대부분 귀화하는 여진족의 추장(우두머리)들을 고려에서 부르던 명칭이었다. 이들은 고려조정으로부터 관직을 수여받았던 도령과 관직을 받지 않았던 도령으로 나타났다. 그것은 사료에서 ‘도령+관직명’과 단순히 ‘도령’이라고 기재된 것을 통하여 유추할 수 있다. 또한 한 지역에서 다수의 도령들도 나타났으며, 부락 내지는 집단의 크기에 따라 도령과 부도령으로 구분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상황은 발해의 대수령과 수령이 구분되거나, 도독과 자사와 같은 관직을 수여받는 수령과 관직이 없이 부락 및 촌에 그대로 산재하고 있던 수령의 모습을 띠는 발해의 상황과 매우 유사하다. 이러한 지방통치방식의 상황은 전근대 왕조에서는 쉽게 보여지는 것으로, 중앙에서 지방으로, 혹은 중심에서 주변으로 통치력이 관철되어 나가는 과정의 일환으로 생각해 볼 수 있겠다.

목차

〈국문초록〉
Ⅰ. 머리말
Ⅱ. 발해 수령의 존재양상
Ⅲ. 고려 도령의 존재양상
Ⅳ. 맺음말-발해 수령과 고려 도령의 상관성
〈참고문헌〉
〈Abstract〉

참고문헌 (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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