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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윤경로 (한성대학교)
저널정보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한국기독교와 역사 한국기독교와 역사 제36호
발행연도
2012.3
수록면
91 - 152 (62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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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105인 사건 피의자들에 관한 사후 행적을 추적한 연구이다. 본 연구에서는 105인 사건 피의자들 가운데 사건 이후 친일로 경도되었던 인물 9명을 선별하여 그들의 친일행적을 추적하였다. 추적 결과 이들 9인의 행적은 대체로 3가지 유형으로 구분된다. 먼저 출옥 후 실업활동에 종사하다가 친일로 경도된 유형이다. 김동원 이근택, 이춘섭, 차균설 등 4인이 이에 해당한다. 다음으로는 출옥 직후부터 친일활동으로 경도된 경우이다. 이에 해당자로 나일봉과 장응진 그리고 윤치호 등 3인을 들 수 있다. 끝으로 출옥 후 중국 상해로 망명한 후 일제의 ‘첩자’와 ‘밀정’ 혐의로 결국 사살당한 옥성빈과 옥관빈 형제 2인의 경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 부류인 상기 4인은 105인 사건에서 풀려난 후 주로 실업 및 종교 활동과 민족개량주의운동에 참여하다가 1930년대 중반이후부터 보다 적극적인 친일 활동의 길을 걸었다. 특히 이들 4인은 일제의 식민지배하에서 주로 경제실업활동에 종사한 실업인이자, 기독교인이었다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두번째 부류인 나일봉과 장응진은 사건 이후 일본 조합교회 교인이 되었다. 특히 나일봉은 출옥 후 바로 일본 조합교회 목사로 변신, 친일활동에 적극 나섰다. 마지막 부류인 옥성빈, 옥관빈 형제는 1933년 중국에서 살해되었다. 옥성빈은 출옥 후 상해로 망명하였지만 상해 망명 직후부터 임정 요인들로부터 ‘요주의 인물’로 지목되어 의심을 받았다. 옥관빈은 당대 재중 한인 가운데 최고의 사업가로 거부가 되어 명성이 높았다. 그러나 사업가로서 대성공을 거둔 그를 바라보는 상해 임정과 한인 독립운동단체의 눈에는 대표적인 ‘한간’(韓奸)으로 비쳐졌다. 따라서 마땅히 처단해야 할 ‘간역(奸逆), 옥역관빈(玉逆觀彬)’으로 단정했고 그 결과 1933년 8월 1일 한인제간단(韓人除奸團)에 의해 처단되었다.
이상 9인의 행적 추적을 통해 105인 사건 이라는 동일한 사건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르는 등 어려움을 당했지만 그들의 이후 행적은 민족과 역사의 길을 걸은 인물과 순응과 훼절의 현실적 길을 택한 자로 구분된다. 이중 상기 9인은 후자에 속한다 할 수 밖에 없다. 이 모두가 국권을 빼앗긴 민족과 나라의 아픔과 슬픔이라 할 것이다.

목차

1. 머리말
2. 105인 사건 당시 9인의 사회경제적 배경
3. 출옥 직후 초기 행적과 동향 : 교육과 실업 및 개량주의운동과 망명 활동
3. 9인의 친일행적의 구체적 실태와 그 성격
4. 맺음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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