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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심기재 (단국대학교)
저널정보
한일관계사학회 한일관계사연구 한일관계사연구 제41집
발행연도
2012.4
수록면
263 - 301 (39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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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는 메이지 초년에 일어난 보신(戊辰)전쟁의 하나였던 도호쿠(東北) 전쟁의 전후처리과정에서 메이지 신정부의 주요 지도자 중의 한 사람이었던 기도 다카요시(木戶孝允)가 보여준 정치적 노력을 고찰하는 것이 목적이다. ‘朝敵’아이즈번(會津藩) 등에 대한 토벌을 강행하는 신정부측과 관대한 처분을 요구하는 오우에쓰(奧羽越) 열번동맹측 사이에 벌어진 전쟁으로, 보신전쟁 중에서 가장 치열했던 도호쿠 전쟁을 신정부의 장래를 좌우하는 ‘대전쟁’으로 간주한 바 있었던 기도는 조기 평정을 위해 스스로 관군 응원차 간토(關東)?호쿠에쓰(北越) 출장을 청원하거나, 전쟁을 진두지휘한 동향 조슈(長州) 출신의 정치적 맹우 오무라의 협조를 받아 관군 증원출병?군수품 조달을 위한 군함 확보를 위해 노력했다.
한편 도호쿠 평정을 눈앞에 두고 대두된 항복 諸藩에 대한 원칙 없는 ‘유화론’을 비판한 기도는 도호쿠 전쟁 조기평정 후의 제번처리 초안을 마련해 정부에 건의하고, 그 결정을 위해 적극적으로 움직였다. 즉 ‘조적’아이즈번을 도호쿠 전쟁 발단의 원인 제공자로 중죄에 해당함을 분명하게 지적한 후에 천황의 재단에 의해 관대한 처분이 내려질 것임을 전망하면서도, 죄의 경중에 따라 아이즈번과 기타 제번의 처분 기준을 달리하여 어디까지나 전후처분이 공명정대하게 이루어져야 함을 강조했다. 이러한 기도의 주장 이면에는 군신관계를 저버린 ‘반역’행동이 중죄임을 분명히 적시한 후에 적대 정도에 따라 ‘형률’을 차등적으로 적용함으로써 조기에 신정부의 권위와 국가기강의 확립이라는 ‘大政一新’의 정치적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는 인식이 작용했다.
한동안 도호쿠 항복제번처분을 둘러싼 신정부내의 의견 대립과 함께 에노모토 다케아키 지휘하의 반정부 탈주 군함의 하코다테 점령대책 마련 등으로 인해 지지부진했던 제번처분 심의는 明治 원년 12월에 들어와 최종 단계를 맞이했다. 즉 오우에쓰 열번동맹에 참가한 제번과 아이즈?쇼나이 동맹 가운데, 신정부에 끝까지 저항한 19번이 각각 減藩,영지 몰수?번주 교체 후의 減封?도쿄 근신처분, 번주 교체와 減封, 減轉封 등의 차별적인 처분을 받았다. 또한 제번처분이 최종 국면을 맞이하고 있을 무렵, 기도는 도호쿠 전쟁 전후처리의 일환으로서 도호쿠 지방을 재편하려는 구상을 병행 추진하고 있었다. 도호쿠 지역의 府縣制 실시와 천황의 도호쿠 민중에 대한 ‘敎化’와 ‘撫育’를 쉽게 하기 위한 제번 민정처리의 차원에서 도호쿠 지역을 7개 지방으로 나누는 분할안을 건의해 정부 논의를 거쳐 승인받았다. 이 행정 분할은 현재의 도호쿠 지방 6縣의 효시로서 그 역사적 의미가 크다.
상기의 도호쿠 전쟁 전후처리(항복제번 처분?행정 분할)과정에 있어서의 기도의 정치적 노력에 대해 신정부내에서 조슈를 대표해 온 기도와 함께 정치적으로 때로는 대립하거나 협조관계에 있었던 사쓰마를 상징하는 인물 중의 한 사람이었던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도 서 한을 보내 이를 인정하고 있었음은 기도의 노력이 헛되지 않았음을 말해주고 있다.

목차

국문초록
1. 머리말
2. 木戶의 도호쿠 전쟁 諸藩처리 인식과 대응(1)-明治 원년 5월말~9월 중순
3. 木戶의 도호쿠 전쟁 諸藩처리 인식과 대응(2)-9월 하순~10월 상순
4. 도호쿠 전쟁 諸藩처분과정과 행정 분할
5. 맺음말
참고문헌
日文抄錄

참고문헌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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