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 내서재 .. 알림
소속 기관/학교 인증
인증하면 논문, 학술자료 등을  무료로 열람할 수 있어요.
한국대학교, 누리자동차, 시립도서관 등 나의 기관을 확인해보세요
(국내 대학 90% 이상 구독 중)
로그인 회원가입 고객센터 ENG
주제분류

추천
검색
질문

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김윤희 (불교문화재연구소)
저널정보
한국미술사학회 미술사학연구(구 고고미술) 美術史學硏究 第270號
발행연도
2011.6
수록면
67 - 95 (29page)

이용수

표지
📌
연구주제
📖
연구배경
🔬
연구방법
🏆
연구결과
AI에게 요청하기
추천
검색
질문

초록· 키워드

오류제보하기
現王圖는 조선시대 불교 薦度齋 중 하나인 現王齋의 會主 現王과 그 권속을 그린 조선 후기 冥界佛畵이다. 현왕은 『佛說預修十王生七經』(이하 『十王經』)에서 閻羅天子의 未來佛로 등장하는 普賢王如來를 지칭한다. 이 보현왕여래가 조선시대 佛家의 常用儀式을 모아 편찬한 儀式集에서 現王齋의 會主로 등장하고, 이를 표현한 불화를 現王幀이라 기록함에 따라 보현왕여래는 현왕이라 지칭되었다. ‘現王’이란 명칭은 불교 의식집의 본문에 “보현왕여래가 冥界에 나타난다[現冥界]”는 문구가 삽입되면서 ‘현왕재’라는 재의 명칭으로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이 명칭은 널리 알려지지 않은 보현왕여래보다는 조선시대 사람이 죽으면 冥界에서 閻羅大王을 만나 심판을 받는다고 하는 인식을 반영하여 성립된 것으로 생각된다.
現王齋는 조선시대 불교 의식집 중 1574년 『權供諸般文』(釋王寺開板)에 亡者의 極樂往生을 위해 死後 3일에 행하는 薦度齋로 처음 소개되었다. 현왕재는 기존 預修十齋의 기본구조에 조선시대 불교의식집의 상용문구, 사후 3일 설행이라는 형식을 추가하여 탄생하였다. 중국에서 설행된 예가 발견되지 않은 현왕재는 조선시대 三日葬이나 사후 3일 설행했던 굿과 같이 서민들의 喪葬禮와 관련되어 시작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현왕도는 1718년작 〈기림사 현왕도〉가 가장 이른 예로 18세기 작품이 11점, 19세기 작품이 54점, 20세기 초 작품이 10점으로 일제강점기 이전까지 총 75여점이 현존한다. 현왕도의 기본구성은 화면 중앙에 현왕이 倚坐하고, 좌우에 大輪聖王과 轉輪聖王, 判官, 錄事, 使者 그리고 供養하는 天人과 童子가 현왕을 감싸듯이 배치된 형식이다. 현왕도의 主尊 현왕은 원래 보현왕여래로 佛格이지만, 불화로 표현될 때에는 十王圖의 十王과 동일하게 帝王形으로 표현되었다. 이는 현왕재가 보현왕여래보다는 명부시왕과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현왕도의 현왕은 점차 염라대왕의 圖像을 차용하면서 『金剛經』을 얹은 冠帽를 착용하기도 하고, 19세기 초 경상도 四佛山 大乘寺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畵僧들에 의해 제작된 현왕도에서는 실험적으로 손에 劒을 들고 등장하기도 한다. 한편 19세기 후반 현왕도에는 시왕도에 등장하는 牛頭羅刹이나 馬頭羅刹, 鬼王 등을 비롯한 권속들이 삽입되면서 화면이 더욱 복잡해지며, 더욱 시왕도와 흡사해지는 경향이 있다.
조선 후기 현왕도는 조선시대 성립된 불교 천도재인 현왕재를 위해 제작한 것이지만 의식집의 표면적인 내용과 달리 보현왕여래를 염라대왕으로 표현하고, 널리 유행한 시왕도의 도상을 차용하였다. 이처럼 현왕도는 조선인들의 사후관념을 반영하여 제작된 불화로 당시 조선인들이 받아들인 명부이미지를 읽을 수 있는 불화로 의의가 있다.

목차

Ⅰ. 머리말
Ⅱ. 조선시대 現王齋와 現王圖
Ⅲ. 現王圖의 구성과 도상적 특징
Ⅳ. 現王圖 형식의 정립과 전개
Ⅴ. 맺음말
참고문헌
국문초록
Abstract

참고문헌 (55)

참고문헌 신청

이 논문의 저자 정보

이 논문과 함께 이용한 논문

최근 본 자료

전체보기

댓글(0)

0

UCI(KEPA) : I410-ECN-0101-2013-609-0026607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