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 내서재 .. 알림
소속 기관/학교 인증
인증하면 논문, 학술자료 등을  무료로 열람할 수 있어요.
한국대학교, 누리자동차, 시립도서관 등 나의 기관을 확인해보세요
(국내 대학 90% 이상 구독 중)
로그인 회원가입 고객센터 ENG
주제분류

추천
검색
질문

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한규무 (광주대학교)
저널정보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한국기독교와 역사 한국기독교와 역사 제37호
발행연도
2012.9
수록면
181 - 212 (32page)

이용수

표지
📌
연구주제
📖
연구배경
🔬
연구방법
🏆
연구결과
AI에게 요청하기
추천
검색
질문

초록· 키워드

오류제보하기
1980년 5·18이 일어나자 광주의 천주교·개신교 인사들은 계엄군의 발포 이튿날인 5월 22일 남동성당에 모여 대책을 논의했다. ‘성당파’라 불린 이들은 대부분 기독교인이었으며, 개신교 목사는 참여하지 않았다. 반면 같은날 도청에서 모인 이른바 ‘도청파’ 중에는 몇 명의 개신교 목사가 참여했다.
사태의 수습방안을 놓고 대체로 ‘성당파’는 강경, ‘도청파’는 온건한 입장을 보였는데, 그 때문에 양측 사이에는 갈등이 일어나기도 했다. 그럼에도 이들은 5월 25일 광주사태수습대책위원회를 함께 구성하여 활동했다. 이 위원회 위원 25명 중 적어도 14명이 기독교인이었다.
수습대책위원회에 참여하지 않은 광주의 개신교 교역자들은 5월 23일 15개 교파가 참여한 광주시기독교수습대책위원회를 조직했다. 이들은 같은 달 26일 이를 광주시기독교비상구호위원회로 개칭하고 구호활동에 중점을 둔 활동을 벌였다.
한편 전남 목포에서는 기장측 목사와 목포NCC가 중심이 되어 5월 25일 목포역 광장에서 목포시기독교연합회 비상구국기도회를 열고 선언문을 발표했다. 이밖에 영암읍교회ㆍ강진읍교회ㆍ해남읍교회 등에서도 시위대에게 음식·의복 등을 지원하며 항쟁에 동참했다.
5·18 당시 기독교계가 입은 피해는 정확히 집계하기 어렵다. 하나의 방편으로 국립5·18묘지에 안장된 ‘유공자’ 670명의 묘비 중 십자가나 세례명이 있는 것은 136건이다. 이들 중 21명이 5·18 기간 중에, 25명이 1980년대에 사망했다.

목차

1. 머리말
2. 광주지역 개신교인의 수습위원회 참여
3. 광주지역 개신교회의 역할과 동향
4. 전남지역 개신교회의 역할과 동향
5. 광주·전남지역 개신교인의 피해상황
6. 맺음말
참고문헌
한글초록
Abstract

참고문헌 (24)

참고문헌 신청

이 논문의 저자 정보

이 논문과 함께 이용한 논문

최근 본 자료

전체보기

댓글(0)

0

UCI(KEPA) : I410-ECN-0101-2014-200-0014368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