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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이동언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저널정보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한국독립운동사연구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42집
발행연도
2012.8
수록면
135 - 167 (33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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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암은 의열단을 창단하여 줄곧 의열투쟁으로 초지일관한 독립운동가이다. 대구은행에 입사하여 근무하던 이종암은 1918년 대구은행 돈 1만 5백 여원을 가지고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이 돈은 이후 의열단 창단과 활동자금으로 쓰이게 된다. 망명 후 이종암은 신흥무관학교를 제2기로 졸업하고 의열단을 창단하고 의열투쟁에 매진하였다.
이종암은 의열단 창단에 누구보다도 큰 역할을 한 인물이다. 의열단 창단과 활동을 위한 자금을 제공하였고, 김원봉과 함께 상해로 가서 3개월간 폭탄제조법과 조작법을 배우는 등 의열단 창단을 위해 매진하였다. 이종암은 의열단 의거를 계획하고 주도하였다. 1920년 제1차 ‘국내기관 총공격거사’ 당시에는 자금조달 및 연락책 임무를 맡았고, 최수봉의거(밀양경찰서 투탄)를 지원하였으며, 1922년 상해 황포탄의거(일본 육군대장 다나카 기이치 저격) 당시에는 제3선 저격수였고, 1922년 의열단 조직개편 이후에는 5인 기밀부의 일원이었다. 1923년 대규모 광역거사(제3차 폭동계획) 추진 시에는 특파단원으로 선발되었다.
이종암은 당시 의열단 활동이 어려움을 겪게 되고, 사회주의 운동자들이 의열단의 투쟁노선을 비난하자 의열투쟁의 새로운 전기를 만들고자 하였다. 이종암은 1925년 신병에도 불구하고 동경거사 준비를 위한 군자금 모금을 위해 국내로 잠입하였다. 이종암은 의열단 단원 11명과 함께 경상남북도 일원에서 군자금 모금 활동을 전개하다가 일제 경북경찰부에 체포되었다. 이종암이 주도한 경북의열단사건이다.
경북의열단사건은 일제가 중대사건으로 규정하고 의열단의 기세를 제압하기 위해 1년간 비밀리에 조사하고 신문보도도 통제하였다. 경북의열단사건의 중심인물인 이종암은 재판과정에서 태연하고 당당하게 대구은행에서 가져간 자금과 의열단에서의 활동 등 전부 시인하였다. 이종암은 법정에서도 일본의 한국에 대한 정책을 비난하고 “우리 조선이 일본의 압박에서 벗어나려면 혁명을 불가불할 수밖에 없지 않소!”라고 일본인 재판장을 질타하며 투쟁하였다. 이종암은 징역 13년을 언도받고 대전형무소에서 복역 중 1930년 5월 19일 위장병·인후병·폐병이 위중하여 형집행정지로 석방된 지 열흘만인 1930년 5월 29일 35세의 나이로 순국하였다. 이종암은 의열단 창단 이후 체포될 때까지 의거 결행을 위해 6차례에 걸쳐 국내로 잠입하여 최일선에서 활동한 행동파였다. 이종암의 조국 독립을 위한 의지는 의열단 의거로 점철되었고 의열단과 운명을 같이한 진정한 의사였다.

목차

1. 머리말
2. 출생과 성장
3. 의열단에서의 활동
4. 법정투쟁과 순국
5. 맺음말
참고문헌
국문요약
영문요약

참고문헌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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