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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저널정보
한국고대사학회 한국고대사연구 한국고대사연구 71
발행연도
2013.9
수록면
207 - 237 (31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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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신라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의 눈에 비친 화랑의 모습을 살펴보려는 목적으로부터 출발했는데, 특히 국왕의 화랑 인식과 그 처우에 주목했다. 신라 사회에서 화랑은 매우 중시되었다. 화랑 관련 저술과 향가가 지어지고, 화랑의 비가 세워진 것도 이 때문이었다. 풍류도는 나라를 흥하게 하려는 목적으로 국왕의 명에 의해 설립되었다. 나라 사람들은 모두 화랑을 존경하여 섬겼다고 한다. 국왕도 화랑을 받들었다는 기록이 여러 차례 나타나고 있다. 국왕과 국인이 모두 화랑을 받들었던 것은 화랑을 미륵의 화신으로 관념화 하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진흥왕은 왕자를 金輪과 銅輪으로 부르면서까지 전륜성왕을 동경했다. 상카라는 전륜성왕이 출현한다는 龍華世界는 일심으로 불교를 받들던 진흥왕의 이상세계일 수 있었다.
국왕은 화랑의 여행에 관심을 보이기도 했고, 화랑 관련 소식이나 소문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화랑과 관련된 상벌을 국왕이 직접 결정한 경우도 있다. 화랑의 행적을 기리는 비는 국왕의 승인을 받아서 건립할 수 있었거나 국가적 사업으로 세워졌을 것이다. 화랑들 중에 從軍할 것을 청하여 국왕의 허락을 받아 공을 세운 경우가 있다. 이처럼 화랑의 여러 활동에 국왕이 직접 관계했다. 따라서 풍류도는 朝廷의 花主를 통해 국가가 직접 조직하고 운영했을 것이다.
花郞과 郞徒는 風流道를 수행하던 집단이었다. 화랑과 낭도들이 추구하던 道는 風流道였고, 풍류도는 단순한 놀이가 아니라 수행해야 할 道로 인식했다. 화랑들에게는 타인과 구별되는 동류의식도 있었다. 화랑의 행적을 새긴 비를 세우기도 했는데, 薛原郞碑와 四仙碑, 그리고 鸞郞碑가 그 경우다. 또한 화랑들의 전기도 편찬되었으니, 金大問의 『花郞世紀』가 그것이고, 풍류도의 연원을 밝힌 『仙史』라는 저술도 전하고 있었다. 진평왕 때의 승려 融天은 彗星歌에서 세 화랑이 금강산으로 가는 길을 쓸어 주기 위해서 혜성이 나타난 것이라고 노래했다. 眞智王 때의 승려 眞慈는 한 걸음에 한 번 절하는 정성으로 未尸郞을 찾아 彌勒佛의 化身으로 받들었다. 경덕왕 때의 忠談은 기파랑을 싱싱한 잣나무에 비견하여 찬송했고, 이 향가는 궁궐의 경덕왕에게까지 알려져 있었다. 화랑 죽지랑은 낭도들의 그리움의 대상이 되었기에 慕竹旨郞歌로 찬송되었다.

목차

국문초록
Ⅰ. 머리말
Ⅱ. 사료의 문제
Ⅲ. 국가와 화랑의 관계
Ⅳ. 국가의 화랑에 대한 대우와 그 배경
Ⅴ. 화랑도의 風流道 인식
Ⅵ. 맺는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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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참고문헌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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