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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최일례 (전남대학교)
저널정보
한국고대사학회 한국고대사연구 한국고대사연구 71
발행연도
2013.9
수록면
239 - 279 (41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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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장수왕대 외교의 방향을 살핌으로써 그에 부응했던 세력들을 설명하고자 하였다. 장수왕대 對中外交의 추이는 크게 3시기로 구분할 수 있었다. 장수왕 전기는(즉위~27년) 남북조와 고르게 외교하였다. 장수왕 중기는(28~49년) 북위와 외교를 단절한 채 송과만 외교하였다. 장수왕 후기는(50~79년) 북위와 더 중점적으로 외교하였다.
장수왕은 평양세력의 협력 아래 평양으로 천도하였고(427), 남북조와 고르게 외교하였다. 이후 북연이 멸망하자 북연민을 영입하였다(436). 이는 고구려의 전세를 강화하여 특히 백제를 강하게 압박할 수 있는 군사력이 되었다. 그러나 고구려가 북연민을 영입했던 사건은 한편으로는 북위와의 갈등을 초래하였다. 이후 고구려는 북위와 단절한 채 송과만 외교하였고 이 시기 신라가 고구려를 압박할 정도로 성장해갔다. 광개토왕의 남정 이후 고구려에 줄곧 종속적인 관계를 유지했던 신라가 급기야는 실직의 들판에서 사냥하던 고구려의 변장을 살해하는 사건마저 발생하였다(450). 얼마 후 고구려는 신라의 북변을 침입하였고(454) 신라 또한 축성 등을 하면서 적극적인 공격태세를 갖추어 나갔다. 신라의 성장은 고구려 내부에서 대송외교에 반대하여 대북위외교를 지지하는 세력의 입장을 강화시켜 주었던 듯하다.
이후 장수왕은 북위와의 외교를 재개하였고(462), 얼마 후 북위가 고구려에 국혼을 제의하였다(466). 비록 고구려와 북위가 국혼에 합의하지는 못했지만 이를 통해 친북위세력의 존재를 확인하였다. 장수왕 60년을 기점으로 고구려는 북위에 보내는 공물의 양을 이전의 배로 하였고, 북위 또한 이에 대한 보답을 조금 늘렸다(472). 그런데 바로 이 시기, 개로왕이 북위에 보낸 국서에는 고구려 내부가 극도로 혼란했고 심지어는 권세있는 귀족과 호족들마저 숙청되었다고 한다. 공교롭게도 장수왕 50년 북위외교가 재개되었고, 점차 북위에 치중해가는 시기에 행해진 숙청이었던 점에서 외교정책과 연관이 있을 것으로 짐작하였다. 그러한 맥락에서 시기별로 차이를 보이는 장수왕대 對中外交의 변화는 대외적인 조건과 그에 대한 대응을 둘러싼 고구려내 귀족세력의 동향과 관계가 깊었던 것으로 파악하였다.

목차

국문초록
Ⅰ. 머리말
Ⅱ. 대중국 외교 기록의 검토
Ⅲ. 외교의 추이와 삼국 관계
Ⅳ. 대북위 외교 재개의 배경
Ⅴ.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

참고문헌 (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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