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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김락기 (인천문화재단)
저널정보
한국역사민속학회 역사민속학 역사민속학회 제42호
발행연도
2013.7
수록면
135 - 167 (33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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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句麗 安市城은 645년 唐 太宗의 고구려 침략 시 唐軍의 공격을 막아내었을 뿐만 아니라, 당태종에게 부상을 입혔다는 전승이 있을 정도로 고구려 입장에서는 승리의 상징과도 같은 곳이다. 현재 학계에서는 中國 遼寧省 海城市 八里鎭에 있는 英城子山城을 안시성으로 보는 견해가 다수이며 근래 요녕성 大石橋市 周家鎭에 있는 海龍川山城에 비정하는 의견도 제출되었다.
그런데 17세기 이후 조선왕조에서는 요녕성 鳳城市 鳳城鎭에 있는 鳳凰山城이 고구려 안시성이라는 견해가 연행록을 비롯하여 여러 문집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며, 17세기 말에는 안시성이 開平縣 인근에 있다는 기록을 따라 봉황산성은 안시성이 아니라 부정하는 견해가 나오고, 이에 대한 재반박이 나오는 등 18세기와 19세기 중엽까지 안시성의 위치에 대한 논의가 지속되었다.
그러한 논의의 내용과 배경에 대한 검토 결과 봉황산성과 고구려 안시성을 최초로 연결하여 본 사람은 그간의 통설처럼 1610년에 사행한 趙緯韓이 아니라 1609년에 사행한 柳夢寅이라는 점을 확인하였다. 그 이후 南九萬이나 徐有聞처럼 안시성의 실제 위치에 대한 자신의 소견을 구체적으로 피력한 경우도 나오게 되었다.
이렇듯 연행록의 저자들이 안시성을 기록한 이유에는 연행 노정에서 예외 없이 만나게 되는 사적이라는 점, 먼저 연행한 사람들의 기록을 참고하였다는 점, 반복적으로 연행에 참가한 역관·역졸 같은 수행원들의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는 점에서 비롯된 바가 크다고 보지만, 그 바탕에는 고구려사, 나아가 한국상고사에 대한 관심이 있다고 생각된다.
한편 안시성 전투와 안시성주에 대한 관심이 임진왜란 이후 지속되었던 것은, 의리를 근본으로 하는 중화주의의 계승자로 자처한 17세기 이후 조선 지식인들의 입장에서 볼 때 안시성주의 ‘城上拜’라는 행위가 중화질서의 회복을 꾀하는 자신들의 지향을 대변하는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으며, 正統論과 尊周論의 입장에서 정통왕조인 명나라와 명나라 황제에 대한 자신들의 의리 관념을 안시성주의 성상배에 투영하였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된다.

목차

[국문요약]
1. 머리말
2. 연행록에 나타난 안시성의 위치 비정
3. 조선시대 안시성 인식의 흐름과 ‘城上拜’
4. 맺음말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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