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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최선자 (건국대학교)
저널정보
한국고대사학회 한국고대사연구 한국고대사연구 72
발행연도
2013.12
수록면
119 - 151 (33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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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신라 황룡사의 창건 과정을 살펴봄으로써 진흥왕이 창건을 통해 궁극적으로 목적했던 바가 왕권 강화였음을 검토하고자 하였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황룡사는 진흥왕 14년(553)에 새로이 궁궐을 지으려던 터에서 황룡이 출현하자 사찰로 변경되어 창건되었다. 그런데 궁궐은 왕권을 상징하는 가장 강한 표상이므로 진흥왕과 황룡사 창건의 관계가 정치적 상관성을 갖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발굴조사 결과에 따르면 현 황룡사지의 지반은 원래 늪지였다. 따라서 우선 궁궐 건설의 계획을 수립하고, 늪지의 매립과 같은 대규모 토목공사를 진행해야 했다. 진흥왕 14년이라는 황룡사 창건 연대는 궁궐이 사찰로 변경된 시점을 나타낸 것이다. 이는 늪지의 매립이 6세기 중반에 완료되고 인근에 도로가 조성되었을 것으로 추정한 연구에 의해 입증된다. 이때 조성된 도로는 격자문 도성의 주된 유구로 이와 궤를 같이 하여 황룡사의 寺域이 확정되었다.
북위와 일본의 사례를 통해서 검토해 본 결과 이러한 도성제도는 율령의 제정ㆍ반포와 일정한 상관관계를 형성했다. 곧 율령에 의한 통치제도를 확립하기 위해 도성을 정비하고 궁궐을 건설했던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법흥왕 7년의 율령 반포 및 동왕 18년의 제방수리 명령에 주목했다.
법흥왕을 이어 즉위한 진흥왕은 전대의 정치ㆍ사회적 분위기를 이어 받는 한편, 유년에 즉위한 까닭으로 왕태후와 이사부의 섭정을 받았다. 그러나 재위 초기는 섭정에 대한 부정적 인식의 확산과 전쟁ㆍ대규모 토목공사 등으로 인해 각종 정치ㆍ사회적 문제가 야기되었다. 이는 궁궐 건설에 대한 부정적 인식 및 계획 변경의 원인이 되었다.
그런데 황룡사 창건에 대한 연구를 진행함에 있어서 반드시 주목해야할 것이 창건의 결정적 역할을 했던 ‘황룡’이다. 이에 여러 기록에 의거한 고대인의 인식 체계를 기준으로 하여 다각도로 황룡의 분석을 시도해 보았다. 곧 황룡은 상서로운 징조로서 정치의 衰缺함을 은폐하고자 한 의도로도 볼 수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상실한 수호신인 황룡을 잡기 위해 사찰을 세우고 호법룡의 역할을 부여한 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황룡에 대한 이러한 인식은 황룡사 창건에 정당성을 부여하였다.
親政 이후 더욱 강력한 왕권을 위해 전륜성왕사상을 수용한 진흥왕은 즉위의례적 創寺 행위인 황룡사 창건을 통해서 왕위의 정당성을 획득하고 왕권을 강화하고자 하였다. 결국 황룡사는 왕권 강화의 기틀을 확립하고자 한 진흥왕의 종교적 상징물이자 정치적 권력 기반으로 작용하였다.

목차

국문초록
Ⅰ. 머리말
Ⅱ. 황룡사 창건 기록의 분석
Ⅲ. 황룡사의 창건 배경
Ⅳ. 황룡사의 창건과 진흥왕의 왕권 강화
Ⅴ.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

참고문헌 (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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