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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론성지 문화영성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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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사연구소 교회사연구 敎會史硏究 第42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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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록·키워드

    이 땅의 천주교는 초기 평신도 지도자들의 자발적인 구도자적 열정과 노력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신앙의 동기를 보면, 당시 서학에 대한 관심을 신앙으로 바꾼 이벽의 권유로 이승훈과 권철신 형제가 복음을 받아들였다. 이들과 달리 정약종은 도교(道敎)에 대한 회의에 빠졌다가 후에 신앙
    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였다. 이승훈에 의해 세례를 받아 하느님의 교회로 들어온 그들은 복음적 삶으로 신앙을 성장시켰고 전파하였다. 이벽은 찾아가서 또 찾아오는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였으며, 권일신은 적극적으로 신앙을 전파하였고, 공동체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는 책임감을 갖고 대처했다. 권철신은 1791년까지 보여주었던 신앙의 실천이 친인척과 제자들에게 큰 영향을 주어 여러 지역 공동체가 세워질 수 있었다. 명도회장으로서 교회 공동체를 위해 헌신한 정약종이 인간의 존엄성과 평등을 실천한 삶은 전교의 원동력이었다.
    이들은 박해를 받아 시련과 유혹을 당하였다. 이벽은 부친의 박해를 받아 집안에 감금되어 1785년 죽음을 당하였다. 1791년 권일신은 정조에 의해 집중적인 회유를 당해 도덕적으로 올바른 결정을 내리기 힘든 상황에서 〈회오문〉(悔悟文)을 지어 신앙을 부인하였지만, 유배 도중 죽음을 당하였다. 권철신은 1791년 이후 1801년까지 신앙생활을 하지 않았다고 진술하였으나, 1801년 박해에 죽음을 당하였다. 이승훈은 1785년에는 〈벽이문〉(闢異文)을 짓고, 1791년에는 관직에서 삭직되었고, 1795년에는 〈유혹문〉(?惑文)을 지어 교회를 떠났으나, 잠잠해지면 다시 교회로 돌아왔다. 정약종은 1801년 박해를 받아 죽음의 공포에 맞서 신앙을 옹호하고 교회 공동체를 보호하면서 목숨을 바쳤다. 그런데 이승훈, 권철신, 권일신 등은 일시적으로나마 신앙을 부인하고 교회를 떠났다고 진술하였다. 그렇다고 이러한 모습이 안타깝지만, 그들을 수치스럽게 하지 않는다. 예수님도 당신 자신을 부인한 베드로를 선택하셨는데, 그는 교회의 큰 기둥이 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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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CI(KEPA) : I410-ECN-0101-2015-230-0009773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