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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朴南守 (국사편찬위원회)
저널정보
한국사학회 사학연구 사학연구 제108호
발행연도
2012.12
수록면
39 - 69 (31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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眞聖王 10년(896) 崔致遠이 찬술한 『崇福寺碑』에서는 신라 하대의 실질적 개조인 원성왕을 추숭하기 위한 숭복사(곡사)의 건립과정과 景文王家의 각종 祭禮를 살필 수 있다. 이에 원성왕의 遺敎에 따른 능묘의 조성, 경문왕의 鵠寺중창에 따른 강경법회의 개최와 원성왕릉에 대한 告由, 그리고 경문왕의 책봉에 따른 종묘에의 告由등 각종 제의를 재구성할 수 있었다.
또한 경문왕은 그의 즉위 초에 개진된 왕위 승계의 정통성 문제와 원성왕의 위패를 遞遷하는데 따른 廟議를, 鵠寺의 중수 뿐만 아니라 懿恭大王의 追封과 ?廟로써 해결하고자 하였다. 그 동안 예영계 내부에서 이루어져 왔던 균정계와 헌정계의 상호 연립은, 신무왕대부터 인겸계를 배제하고 경문왕 즉위 이후 원성왕을 드러내어 凡元聖王系의 단합을 표방하기까지 유지되었다. 그러나 경문왕은 당 懿宗의 책봉을 계기로 그의 考啓明을 五廟에 ?廟하고 왕자 晸을 태자에 책봉함으로써 헌정계로 권력을 집중시켜 나갔다. 그 과정에서 윤흥과 김예 등의 모반사건을 가혹하게 진압함으로써 국학진흥과 근시기구의 확장 등 정치개혁을 단행할 수 있었다. 이후 왕권의 추이는 魏弘을 중심으로 한 헌정계 내의 景文王家주도로 이어지는 폐쇄적인 것이었다. 이는 신라 김씨 왕족 내에서 다른 가계가 왕통을 계승하는 것을 차단한 것으로서, 경문왕가 왕통의 단절이 신라 김씨 왕통의 단절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을 배태한 것이었다.

목차

요약
머리말
Ⅰ.「崇福寺碑」에 나타난 하대 왕실의 祭禮
Ⅱ. 경문왕대 元聖王 追崇의 정치사회적 의의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

참고문헌 (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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