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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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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저널
저자정보
김태순 (일본 가나가와대학교) 이윤선 (목포대학교)
저널정보
비교민속학회 비교민속학 比較民俗學 第53輯
발행연도
2014.4
수록면
297 - 324 (28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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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다 쥬리아는 임진왜란 당시 어린 나이에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끌려간 한국인이다. 본명은 확실치 않다. 세례명이 쥬리아다. 일반적으로 한국에서는 ‘오다’로, 일본에서는 ‘오다아’로 불린다. 고즈시마에서는 ‘오다이’라고도 표기한다. 일본에 끌려간 후 크리스천 영주인 고니시 유끼나가(小西行長)의 양딸이 되었다. 크리스천 교육을 받았다. 그 후 고니시家가 몰락하였다. 기리시탄(크리스천) 금지령이 내려졌다. 죄인으로 유배되어 여러 섬을 거치게 된다. 1612년에는 고즈시마(神津島)에 도착한다. 도쿄도(東京都) 소속의 작은 섬이다. 이곳에서 섬사람들을 치료해주는 등 숭고한 삶을 살게 된다. 고니시家의 가업인 약초 제조법을 익힌 덕이다. 많은 봉사를 하다가 생을 마치게 된다.
섬사람들은 당을 짓고 묘비를 세웠다. ‘보탑님(?塔?)’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섬마을의 수호 신으로 경배 받게 되었다. 해변에도 당을 지어 ‘오다이 묘진(オタイ 明神)’이라고 하였다. 바다를 지키는 신으로도 경배하게 된 것이다. 50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묘비와 당 앞에는 사까끼 나무와 꽃이 끊임없이 봉헌되고 있다. 이 소문은 로마 교황청까지 전해졌다. 교황청은 고즈시마의 오다쥬리아를 인정하게 되었다. 오다쥬리아 추모제를 한일 양국에 적극 권장 하게 되었다. 추모제가 한일 친선사업의 성격을 띠게 된 배경이다.
주목 할 점은 고즈시마에 성당도 없고 가톨릭 신자도 없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일 가톨릭 신자들이 매해 이곳에 모여 미사를 본다. 섬마을 사람들은 多神 신앙을 갖고 있다. 자기들 방식대로 쥬리아의 당 또는 묘비 앞에 봉헌한다. 가톨릭 신자들의 순례 여행을 적극적으로 후원하기도 한다. 이곳을 방문하는 가톨릭 신자들도 섬마을 사람들의 독특한 추모 방식을 이해하게 되었다.
본고는 2013년 5월 25일에 열린 제44회 쥬리아제를 참관하고 그 대강을 보고하는 방식으로 정리한다. 쥬리아라는 한 명의 조선인물을 대상으로 하지만 그 숭배의 방식이 각각 다르다는 점이 흥미를 끌었다. 특히 종교관이 다른 섬사람들과 카톨릭 신자들이 쥬리아를 수용하고 숭배하는 방식에 주목하였다. 일명 가끄레 크리스천이라 불리는 종교적 전통과 관련하여 일본의 민간신앙이 기능하는 바를 추적한 셈이다. 특히 교황청이 권장하는 한일 양국의 교류 양상을 주목하고 한일 우호 친선이 쥬리아를 매개로 확산되는 축제 민속적 현상에 대해 연구숙제를 떠안게 되었다.
아쉬운 점은 가끄레 크리스천의 본산이라고도 할 수 있는 히라도, 나가사키 등의 흔적을 공동 연구하였으나 본고의 성과로는 수합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쥬리아의 행적이 고즈시마에 집중되어 있어서 직접 연결시킬 고리를 확증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향후 고를 달리하여 총체적 행적을 복원하고 재보고할 것을 기약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인 오다쥬리아를 카톨릭과 일본의 민간신앙, 그리고 한국이라는 공간을 배경으로 비교 민속학적 관점에서 접근하고 학계에 알렸다는 점이 본고의 성과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목차

[국문초록]
Ⅰ. 일본의 카톨릭 전래 배경과 임진왜란
Ⅱ. 고즈시마의 쥬리아 행적
Ⅲ. 고즈시마의 민속신앙과 일본 민간 神格
Ⅳ. 쥬리아 추모제 진행과 인식
Ⅴ. 남은 숙제
참고문헌

참고문헌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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