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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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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저널
저자정보
임영애 (경주대학교)
저널정보
한국미술사학회 미술사학연구(구 고고미술) 美術史學硏究 第278號
발행연도
2013.6
수록면
5 - 30 (26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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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문왕 재위 15년 동안 정확한 제작시기가 밝혀진 불상만 6구이다. 기년명 불상이 드문 신라조각의 현실을 감안하면 이는 대단히 많은 수이다. 흥미롭게도 존명을 알 수 없는 안락사의 철조장 육존상을 제외하고는 모두 비로자나불(노사나불)이다. 물론 이 중 3구는 현재 전하지 않아 그 면모를 파악할 수 없다는 아쉬움이 있다. 하지만 6구 이외에도 경문왕, 헌안왕대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비로자나불상만도 수십 여구에 이른다. 이처럼 경문왕대를 기점으로 비로자나불상이 급증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이 글은 경문왕대에 불상, 특히 비로자나불상의 숫자가 급증하게 된 점에 주목한 것이다.
지금까지 신라 하대의 불교미술은 중앙 정권의 약화, 지방 중심 호족들의 등장과 더불어 불교미술 역시 지방 호족들의 후원을 받으며 발전했다고 알려져 왔다. 그 결과 경주 중심의 불상 제작에서 벗어나 지역적인 특성을 보여주는 다양한 불상 양식이 등장하였다고 보기도 하였다. 하지만 경문왕대 불교미술의 양상은 알려진 것과는 차이가 있다. 경문왕대 불교조각은 지방 호족보다는 왕실과 더 많은 관련이 있으며, 화엄종, 법상종, 선종 등 종파의 구분 없이 비로자나불상을 조성하고 봉안하였다. 또 분포양상도 경주를 포함하여 전국적이어서 경주를 제외한 지역에만 편중되었다고 보기도 어렵다.
이처럼 경문왕대 불상, 특히 비로자나불상이 전국적으로 유행하게 된 배경에는 신라 하대 원성왕계 왕으로서의 그의 입지가 약했다는 점이 큰 역할을 하였다. 헌안왕의 사위로 왕위에 오른 그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강력한 왕권이었다. 특히 지방통치력의 강화를 위해서 그에게 필요한 것은 선사들의 힘이었다. 이런 이유로 그는 끊임없이 선승과의 교류를 시도했고, 선교의 구분을 두지 않고 불교를 후원하고 불교미술을 조성함으로써 왕실의 안정과 정당성을 확보하려 했다. 경문왕의 불교정책은 선종의 확산에 크게 기여하였고, 선종 사찰은 대집단화되었다. 당시 선종 사찰은 보통 수백 명, 많게는 수천 명의 선승을 확보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이 노동력의 원천이 되어 거대한 철불을 비롯한 각종 불교미술을 조성하는 일이 가능했던 것이다. 불교조각 중에서는 비로자나불상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데, 특히 비로자나불상은 그 어떤 불상보다도 경문왕 전제왕권의 메타포로 적합했기 때문이다. 물론 경문왕대 조성된 불상이 모두 왕실의 후원아래 조성된 것은 아니다. 하지만 경문왕의 강력한 불교 후원이 있었기 때문에 이에 힘입어 전국적인 불교조각을 비롯한 각종 불교미술의 융성이 가능했다고 본다. 그의 의도가 어디에 있었던지 간에 경문왕은 신라 불교미술의 마지막 불꽃을 피운 왕으로 평가할 수 있다.

목차

Ⅰ. 머리말
Ⅱ. 혼란 이후의 정치적 안정, 그리고 경문왕대의 불교
Ⅲ. 경문왕대 불교조각의 현황
Ⅳ. 신라 하대 경문왕대 불교조각의 재인식
Ⅴ. 맺음말
참고문헌
국문초록
Abstract

참고문헌 (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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