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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방광석 (인천대학교)
저널정보
한일관계사학회 한일관계사연구 한일관계사연구 제48집
발행연도
2014.8
수록면
223 - 254 (32page)
DOI
10.18496/kjhr.2014.08.48.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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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에서는 메이지유신 이후 약 40년에 걸쳐 일본의 국내정치와 대외정책에 깊숙이 관여한 메이지정부의 중심인물인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조선 인식과 정책을 막말부터 청일전쟁 이후까지의 시기에 초점을 맞추어 해명하려고 하였다.
이토는 ‘존황양이’ 론자인 요시다 쇼인의 문하에서 대외팽창론의 영향을 받았고 실제 양이운동에도 가담했으나 메이지유신 이후 ‘정한론’과 타이완 침공 등 대외문제에서는 현실적 입장에서 신중하게 반대 입장을 제시했다. 대외문제에 적극적으로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였으나 정부의 정책이 결정된 다음에는 자신의 견해와 다르더라도 그것을 끝까지 반박하지 않고 수용하는 정치적으로 유연한 자세를 취했다.
대외정책에서 이토의 현실적인 자세는 이후에도 유지되었다. 임오군란시기 이토는 조선의 ‘독립’을 적극적으로 원조하자는 의견을 제시했으나 청의 힘을 의식한 이노우에 가오루의 소극정책을 받아들였다. 갑신정변의 처리과정에서는 이노우에의 강경론에 비해 반대로 이토가 온건론을 취했다. 그러나 청불전쟁의 영향 등으로 일본의 조선 ‘독립’론이 어느 정도 인정을 받게 되면서 이토는 조선에 청과 대등한 권한을 부여한 텐진조약을 체결시키는데 성공했다.
갑신정변 이후 일본의 조선정책은 야마가타 아리토모의 의견서에서 제시된 조선의 중립화였다고 할 수 있다. 청일전쟁의 승리로 일시 ‘보호국화’정책을 취하기 했으나 삼국간섭, 명성황후 시해사건의 영향으로 서양열강이 조선의 독립에 명확한 태도를 보이고 조선정부도 일본에 반발하면서 일본의 조선정책은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이토는 청일전쟁 이전에는 청일협조 속에서 조선의 ‘독립’을 추진했고 청일전쟁 후 조선 ‘중립국화’를 제시하기도 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힘에 의해 움직이는 국제정치에 대한 현실적 판단에서 나온 것이지 궁극적으로 조선의 자립을 인정해서는 아니었다. 일본이 군사적 우위를 갖게 되고 서양 열강이 일본의 의도를 용인할 경우 ‘보호국화’등 조선에 대한 단독지배 정책을 추진했던 것이다.

목차

국문초록
머리말
1. 막말-메이지 초기의 조선 인식
2. 임오군란·갑신정변 시기의 조선 정책
3. 청일전쟁 시기의 조선 정책
맺음말
참고문헌
日文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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