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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노승석 (여해고전연구소)
저널정보
한국양명학회 양명학 陽明學 제39호
발행연도
2014.12
수록면
103 - 144 (42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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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심(朴?, 1652∼1707)은 구당(久堂) 박장원(朴長遠)의 아들이고 암행어사 박문수(朴文秀)의 종조부로서 숙종조 경연관을 지냈다. 그는 박장원의 아들로서 유학의 학통을 계승하였고, 그의 아들 박양한도 국조문장가에 선정될 만큼 문장이 뛰어났다. 그는 박세채와 송시열, 윤증의 문인으로서 어려서부터 유교경전을 독실히 배워 조정으로부터 학문이 높은 선비로 천거를 받았다. 특히 송대 주자학에 정통하였고, 조선의 양명학자 정제두와 도의지교를 맺었다. 한평생 처사적인 삶으로 부귀공명과 사환(仕宦)의 길에 나아가기 보다는 진정한 도학(道學)을 강구하는데 전념하였다.
그는 조정에서 학문이 높은 선비로 천거되었으나 매번 벼슬을 사양하였다. 홍천 현감에 재직 시 기근과 전염병에서 백성을 구제하고, 영천 군수 시절에는 영천에서 공맹(孔孟)의 유풍을 크게 진작시키고 빈민구제의 공로를 세웠다. 이에 고을의 유자(儒者)들은 그를 “지금의 공자”라고 칭송하였다.
박심은 항상 유학의 실천적인 학문에 힘쓰고 위기지학(爲己之學)의 자세로 학문에 임하였다. 이에 젊은 시절부터 박세채와 송시열, 윤증으로부터 학문이 높은 경지에 올라있음을 인정받았다. 박세채는 일찍이 그가 유학을 발전시킬 큰 재목임을 인정했다. 송시열은 박심이 자신의 스승인 사계 김장생에 대해 그의 후손이 가풍을 잇지 못하는 현실을 지적한 것에 대해 깊은 감명을 받았고, 그를 후생가외(後生可畏)한 인물로 평가하였다. 윤증은 박심의 고명한 학식을 인정하고 그의 의견이 많은 깨우침이 되었다고 하였다.
그의 학문적인 업적은 그 당시 교유한 인물들의 문집을 통해 알 수가 있는데, 소론계열 문인들의 상황과 주자학, 양명학의 사상적 논쟁을 연구하는데 있어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송시열을 비롯한 윤증, 박세채 등의 소론계열 학자들과의 관계에서 박심은 정통 주자학의 이론을 충실히 배운 도학자의 입장에서 성학(聖學)과 천리(天理)를 논하고, 논변과 비평을 가하였다. 특히 정제두의 양명학 이론이 형성되어 가는 과정에서 그는 천명(天命)과 성명(性命)의 이론에 대한 정사(正邪)를 변증하는 역할을 하였다. 정제두의 학문적 이론이 허구에 빠지지 않도록 바로 잡아주기도 하였고, 간혹 서로 다른 이견으로 쟁론을 하기도 했다. 이러한 점이 바로 정제두의 양명학 이론이 발전하는데 기여한 것으로 여겨진다.
박장원이 현달한 고위직에 오르면서부터 그의 후손이 본격적으로 충정지역에 세거하기 시작하였다. 충청지역은 고령박씨의 세거지이고, 그 영향권에 속한 보령은 박심이 사승관계 혹은 교유관계에 있는 당대의 학자들과 교유한 곳이다. 이를 통해 또한 보령이 처사로서 도학을 연마한 박심의 활동 근거지였음을 알 수 있었다. 본 논문의 성과는 박심과 교유한 인물들의 문헌을 추적하여 박심이라는 인물을 새롭게 조명해본 것이다. 요컨대 당시 학자들이 박심에게 전한 많은 편지들은 박심의 학문을 연구하는데 매우 중요하므로 앞으로 더욱 심층적으로 연구할 과제이다.

목차

【요약문】
Ⅰ. 머리말
Ⅱ. 박심(朴?)의 가계(家系)
Ⅲ. 박심의 행력과 업적
Ⅳ. 박심의 사승(師承) 및 교유(交遊)관계
Ⅴ. 박심의 묘소와 보령 관련성
Ⅵ.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

참고문헌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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