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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균관대)
저널정보
고려사학회 한국사학보 韓國史學報 제5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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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록·키워드

    이 글의 목적은 국제공산당의 1924년 2월 결정서의 채택 경위와 그 의의를 밝히는 데에 있다. 2월 결정서는 대립되는 두 초안의 격렬한 투쟁 속에서 태어났다. 보이틴스키와 쿠시넨이 작성한 두 초안은 조선 문제를 대하는 국제당 안팎의 두 의견 그룹을 대표했다. 그 중 하나는 국제당 동방부장 보이틴스키와 그 예하의 전권위원 및 사무관들, 한명세를 수반으로 하는 국민의회파 공산그룹의 연합 진영이었다. 다른 하나는 간부회 위원 쿠시넨과 그에 동조하는 국제당 집행위원들, 이동휘·이성 등으로 대표되는 상해파·순이시파 공산그룹들의 연합 진영이었다.
    두 초안에 내재하는 차이점을 바르게 이해해야 한다. 민족통일전선 정책을 지지하느냐 혹은 반대하느냐의 차이로 보는 견해는 실제와 다르다. 두 초안은 민족통일전선 정책을 실행에 옮겨야 한다고 보는 데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었다. 문제는 방법이었다. 보이틴스키 초안은 민족주의 좌우 분화론을 기계적으로 적용하고자 했다. 그에 반해서 쿠시넨 초안은 광범한 대중적 단결을 이끌어낼 수 있는 방식을 선호했다. 국내 중심론이었다. 3·1혁명 이후에 조선 내지에서 발흥하고 있는 대중운동의 열기를 토대로 하여 민족통일전선 기관을 설립해야 한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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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CI(KEPA) : I410-ECN-0101-2016-911-0012352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