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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육군)
저널정보
고려사학회 한국사학보 韓國史學報 제60호
발행연도
수록면
243 - 276 (34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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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키워드

선조대 장수였던 박진은 密陽府使시절 33세의 나이에 임진왜란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는 개전 초기 소산역과 작원관에서 일본군의 공격을 저지하고자 하였으나, 수적열세로 연이어 패배를 당하였다. 그럼에도 박진은 이들에 맞서 항전하였고, 그 공적을 인정받아 慶尙左兵使로 임명을 받았다. 당시 경상좌도의 상황은 개전 초기 일본군에 의해 대부분의 지역이 유린을 당하면서, 군사력이 와해되었다. 경상좌병사로 부임한 박진은 행정관내의 명령체계를 구축하고 군사들을 수습하였다. 그 결과 경상좌도 조선군은 반격을 감행하여 영천성과 경주성 등 주요 읍성들을 수복하는 등 육전에서의 전황을 유리하게 이끌었다. 이후 안동으로 돌아간 박진은 이 지역 의병장들과 수차례 논의 하면서 상호 협조체제를 구축하여 이 일대에서 활동하는 일본군을 격퇴하였다.
이듬해 4월 그는 조정에 입조하였으며, 명나라 장수와 군사를 논하면서 도성의 상황과 관련된 정보를 입수하기도 하였다. 이후 박진은 督捕使로서 다시 경상도로 내려가 밀양과 초계 등지에서 일본군과 맞서 싸우면서 주요 지역을 방어하였으며, 경상우도와 전라도, 황해도에서 군사업무를 수행하다가 1597년 38세로 사망하였다.
박진은 임진왜란기 장수로 활동하면서 당대로부터 긍정적인 평가와 함께 부정적인 평가도 함께 따라다녔으며, 수많은 전공을 세웠음에도 그의 사후에는 임진왜란 공신명단에 오르지 못했다. 이로 인해 그 후대에 이르러서도 그 공적에 대해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다. 하지만 전쟁 당시 육전에서 뛰어난 전공을 세웠던 그의 행적들은 조선의 대표적인 명장으로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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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국문초록〉
  2. 1. 머리말
  3. 2. 임진왜란의 발발과 밀양 부사로서의 항전 활동
  4. 3. 개전 이후 경상좌병사로서의 반격과 주요지역 수복 활동
  5. 4. 경주 수복 이후의 군사 활동과 사후 평가
  6. 5. 맺음말
  7.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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