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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키워드
고구려의 주몽신화는 부여의 동명신화와 그 내용이 매우 흡사하다. 그런데 동명신화와 주몽신화의 차이점은 시조모<SUB>始祖母</SUB>에 대한 묘사이다. 동명신화에서는 시조모를 ‘왕<SUB>王</SUB>의 시비<SUB>侍婢</SUB>’라고 표현했으나 광개토왕비에서는 주몽의 어머니를 ‘하백여랑<SUB>河伯女郞</SUB>’ ‘하백지녀<SUB>河伯之女</SUB>’라고 묘사하고 있다. 『삼국사기』, 『삼국유사』『동명왕편』 에서는 ‘유화<SUB>柳花</SUB>’라는 이름도 나타난다.
본고는 시조의 어머니에 대한 묘사에 서로 다름이 있는 것에 주목하였다. 표현에서 차이가 나는 이유를 고구려사 전개 과정에서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주몽 세력은 고구려를 건국하였으나 기존 집단을 압도하지는 못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동명성왕 6년(B.C.32)에 태백산 동남쪽의 행인국<SUB>荇人國</SUB>을 정벌하고 성읍<SUB>城邑</SUB>으로 삼았다. 백두산과 압록강 유역을 확보한 후 물과 관련이 많은 ‘하백<SUB>河伯</SUB>’ 관련 전설을 ‘하백지녀’로 만들어 시조모를 대신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부여왕실은 겨우 명맥만 유지하다가 문자왕<SUB>文咨王</SUB> 3년(494)에 나라를 들어 고구려에 항복하였다. 부여가 멸망하자 부여의 일부세력은 서북쪽으로 가 두막루국을 세웠다. 고구려는 부여 멸망 이후 ‘동명’이라는 왕호를 추모왕에게 사용하게 되었을 것이다. 한편 같은 부여계<SUB>夫餘系</SUB>인 백제는 성왕<SUB>聖王</SUB> 16년(538)에 사비로 천도한 이후 국호<SUB>國號</SUB>를 ‘남부여’라 칭하였다. 부여가 멸망했음에도 불구하고 ‘남부여’라는 국호를 사용한 것은 ‘부여’가 가지는 역사적인 위상을 빌어 왕실 권위를 강화하려는 뜻이었다.
본고는 시조의 어머니에 대한 묘사에 서로 다름이 있는 것에 주목하였다. 표현에서 차이가 나는 이유를 고구려사 전개 과정에서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주몽 세력은 고구려를 건국하였으나 기존 집단을 압도하지는 못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동명성왕 6년(B.C.32)에 태백산 동남쪽의 행인국<SUB>荇人國</SUB>을 정벌하고 성읍<SUB>城邑</SUB>으로 삼았다. 백두산과 압록강 유역을 확보한 후 물과 관련이 많은 ‘하백<SUB>河伯</SUB>’ 관련 전설을 ‘하백지녀’로 만들어 시조모를 대신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부여왕실은 겨우 명맥만 유지하다가 문자왕<SUB>文咨王</SUB> 3년(494)에 나라를 들어 고구려에 항복하였다. 부여가 멸망하자 부여의 일부세력은 서북쪽으로 가 두막루국을 세웠다. 고구려는 부여 멸망 이후 ‘동명’이라는 왕호를 추모왕에게 사용하게 되었을 것이다. 한편 같은 부여계<SUB>夫餘系</SUB>인 백제는 성왕<SUB>聖王</SUB> 16년(538)에 사비로 천도한 이후 국호<SUB>國號</SUB>를 ‘남부여’라 칭하였다. 부여가 멸망했음에도 불구하고 ‘남부여’라는 국호를 사용한 것은 ‘부여’가 가지는 역사적인 위상을 빌어 왕실 권위를 강화하려는 뜻이었다.
#시조모
#하백녀
#유화
#동명
#두막루국
#ancestral mother
#the Daughter of the Earl of the River (河伯女郞)
#Yuhwa(柳花)
#King Dongmyeong
#DoumolouState (豆莫婁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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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 요약
- 1. 머리말
- 2. 국가 형성기의 건국신화
- 3. 왕권 강화와 건국신화의 변용
- 4. 맺음말
- 참고문헌
- Abstract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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