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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아역사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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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국학진흥원 국학연구 국학연구 제28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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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 40 (34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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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키워드

고구려의 주몽신화는 부여의 동명신화와 그 내용이 매우 흡사하다. 그런데 동명신화와 주몽신화의 차이점은 시조모<SUB>始祖母</SUB>에 대한 묘사이다. 동명신화에서는 시조모를 ‘왕<SUB>王</SUB>의 시비<SUB>侍婢</SUB>’라고 표현했으나 광개토왕비에서는 주몽의 어머니를 ‘하백여랑<SUB>河伯女郞</SUB>’ ‘하백지녀<SUB>河伯之女</SUB>’라고 묘사하고 있다. 『삼국사기』, 『삼국유사』『동명왕편』 에서는 ‘유화<SUB>柳花</SUB>’라는 이름도 나타난다.
본고는 시조의 어머니에 대한 묘사에 서로 다름이 있는 것에 주목하였다. 표현에서 차이가 나는 이유를 고구려사 전개 과정에서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주몽 세력은 고구려를 건국하였으나 기존 집단을 압도하지는 못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동명성왕 6년(B.C.32)에 태백산 동남쪽의 행인국<SUB>荇人國</SUB>을 정벌하고 성읍<SUB>城邑</SUB>으로 삼았다. 백두산과 압록강 유역을 확보한 후 물과 관련이 많은 ‘하백<SUB>河伯</SUB>’ 관련 전설을 ‘하백지녀’로 만들어 시조모를 대신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부여왕실은 겨우 명맥만 유지하다가 문자왕<SUB>文咨王</SUB> 3년(494)에 나라를 들어 고구려에 항복하였다. 부여가 멸망하자 부여의 일부세력은 서북쪽으로 가 두막루국을 세웠다. 고구려는 부여 멸망 이후 ‘동명’이라는 왕호를 추모왕에게 사용하게 되었을 것이다. 한편 같은 부여계<SUB>夫餘系</SUB>인 백제는 성왕<SUB>聖王</SUB> 16년(538)에 사비로 천도한 이후 국호<SUB>國號</SUB>를 ‘남부여’라 칭하였다. 부여가 멸망했음에도 불구하고 ‘남부여’라는 국호를 사용한 것은 ‘부여’가 가지는 역사적인 위상을 빌어 왕실 권위를 강화하려는 뜻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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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요약
  2. 1. 머리말
  3. 2. 국가 형성기의 건국신화
  4. 3. 왕권 강화와 건국신화의 변용
  5. 4. 맺음말
  6. 참고문헌
  7. Abstra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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