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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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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저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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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대학교 인천학연구원 인천학연구 인천학연구 제14권
발행연도
2011.2
수록면
45 - 78 (34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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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병합 이전 인천은 한국에서 서구 근대 문물 유입의 창구로서 위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병합 이후 인천은 ‘세계와 한국의 만남의 장소’로서 위상을 잃어버렸다. 그 대신 인천이 새롭게 가지게 된 중요한 위상 중 하나는 대도시 경성에 인접한 해안 행락지로서 위상이었다. 이 위상은 1910년대부터 시작된 월미도 유원지의 개발과 1930년대 후반 송도 유원지의 개발로 실현되었다. 월미도 유원지와 송도 유원지는 모두 천혜의 풍광을 가진 곳이었지만, 식민지권력의 인공적 개발 과정을 거쳐 비로소 근대 도시인의 행락지가 되었다. 그리고 행락지의 인공미는 조선인이 식민지 근대를 내면화하는 유력한 통로로 기능했다. 물론 이런 근대적 행락지로서 위상에 대한 ‘다른 시선’도 있었다. 근대적 행락지에 고유한 조선적 의미를 부여하려는 시도도 존재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런 시선은 다수의 것일 수 없었다. 한편 1930년대 후반 경성과 인천을 하나의 권역으로 한 광역도시계획 구상 속에서 인천의 행락지로서 위상은 다시 한 번 부각되었다. 그리고 그에 따라 경성-인천 간 고속도로 계획 같은 것이 등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전쟁이 격화되는 가운데 이런 계획은 공상에 그칠 수 밖에 없었다. 오히려 전시체제가 심화되면서 인천의 행락지로서 위상을 대체한 것은 이른바 연성(鍊成)이었다. 그런데 연성은 실질적으로는 행락의 다른 이름이기도 했다. 행락지로서 위상은 단절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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