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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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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저널
저자정보
서정목 (서강대학교)
저널정보
서강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서강인문논총 西江人文論叢 第47輯
발행연도
2016.12
수록면
361 - 392 (32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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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당나라에서 불법을 닦은 신라 왕자 출신 세 고승의 정체와 출가계기를 밝힌 것이다. 『三國史記』와 『三國遺事』, 『宋高僧傳』, 『九華山化城寺記』 등을 통하여 논증한 이 세 왕자들의 정체는 다음과 같다.
500 나한 가운데 455번째 나한인 無相禪師는 31대 신문왕의 넷째 아들이다. 『삼국사기』에서 그의 이름은 金嗣宗이다. 사종은 683년 5월 7일 혼인한 신목왕후가 낳은 적통 원자이다. 691년 왕자 이홍을 태자로 책봉할 때 그는 태자 후보 1위였다. 그러나 부모의 혼외 관계에서 677년에 태어난 동복형 이홍이 태자로 책봉되었다. 그는 692년 효소왕 즉위 때에 부군으로 책봉되었으나 700년 5월 ‘경영의 모반’에 연루되어 부군에서 폐위되고 원자의 지위도 잃은 것으로 보인다. 728년 7월 성덕왕의 ‘王弟’ 자격으로 당나라에 숙위 갔다. 그의 나이 45세 때였다.
釋無漏는 31대 신문왕의 다섯째 아들이다. 『삼국사기』에서 그의 이름은 金釿{欽}質이다. 702년 효소왕이 승하했을 때는 근{흠}질이 왕위 계승 제1 후보였다. 『삼국사기』의 687년 2월 ‘元子生’ 기록은 신문왕의 두 번째 원자, 이 근{흠}질의 출생연월이다. 그는 왕위 계승전에 두려움을 느끼고 왕위를 형에게 양보하고 출가하였다가 726년 5월 王弟의 자격으로 조공사로 당나라에 갔다. 그는 이때 40세였다.
安徽省池州靑陽의 九華山에는 지장보살의 화신으로 불리는 신라 왕자 金喬覺의 시신에 금을 입혀 ⺼身佛로 만든 세계 최초의 등신불이 있다. 그는 696년생이다. 696년의 신라 왕은 32대 효소왕이다. 김교각은 32대 효소왕과 왕비 성정왕후의 아들이다. 『삼국사기』에 나오는 그의 이름은 김수충이다. 그는 성덕왕의 태자인 4촌 중경과 다투었다. 717년 중경이 사망한 뒤에는 중경의 아우 승경과 태자 자리를 다투었다. 719년 성덕왕과 소덕왕후의 혼인이 추진되는 시점에 당나라로 갔다. 나이 24세 때였다.
이 세 왕자는 모두 속세의 왕위 쟁탈전에 휘말려 골육상쟁을 벌이다가 패배하거나 양보하고 불교에 귀의하였다가 어쩔 수 없이 이 땅을 떠났다. 그들이 불법을 깨치기 위하여 당나라로 간 것으로 되어 있는 것은 미화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속세의 정쟁의 더러움에 실망하여 깊이 인생이 허무하고 허망하다는 것을 느끼고, 석가모니가 성을 넘어 출가[踰城出家]한 것처럼 이 땅을 떠난 것도 또한 사실이다.

목차

국문초록
1. 서론: 당나라 고승이 된 신라 왕자 3명
2. 본론: 문헌에 대한 정밀 검토
3. 결론: 무상은 김사종, 무루는 김근{흠}질, 교각은 김수충이다.
참고문헌
Abstract

참고문헌 (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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