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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이재석 (한성대학교)
저널정보
한일관계사학회 한일관계사연구 한일관계사연구 제55집
발행연도
2016.12
수록면
3 - 37 (35page)
DOI
10.18496/kjhr.2016.12.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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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에서는 多賀城碑가 후세의 제작이 아니라 당시의 실물이라는 현재 일본 학계의 통설에 입각하여 多賀城碑文속에 보이는 ‘말갈국’의 문제 및 비문의 작성자인 藤原朝臣朝獦의 현창 의도에 관해 살펴보았다. 이 비가 건립되는 762년이란 시기는 藤原朝臣朝獦의 부친인 당시의 실권자 藤原朝臣仲麻呂가 소위 ‘신라정토’를 슬로건으로 대대적인 군사 준비 작업을 추진하고 있던 때였던 만큼, 多賀城碑의 건립을 에미시 정토와 신라정토라는 당시 일본의 국내적 국제적 문제의 연장선상에서 이 비의 건립문제를 바라보아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필자는 藤原仲麻呂정권의 군사적 확대 정책의 양대 축으로서 ‘新羅征討’와 에미시 경략을 언급하였는데, 그의 아들 藤原朝臣朝獦은 당시 그 양대 축의 선봉에 서서 규슈와 동북을 오가며 양 부문을 모두 아우르면서 부친 藤原仲麻呂의 기대를 한 몸에 받는 존재였다. 多賀城碑는 바로 그러한 때 건립되었다. 藤原朝臣朝獦이 多賀城(柵)의 최초 조영자였던 大野朝臣東人의 존재감을 비문에 새겨주었던 배경에는 大野朝臣東人이 720년대부터 陸奧按察使로 재직하며 오랜 기간에 걸쳐 多賀城에 남긴 족적을 무시할 수 없었다는 측면과 藤原氏의 大野朝臣東人에 대한 인식이 그렇게 부정적이지 않았을 가능성을 제시하였다. 또한 ‘말갈국’과 ‘蝦夷國’을 기재해 넣은 것은 陸奧國이 가지는 지리적 위치와 일차적으로 관계가 있겠지만, 藤原朝臣朝獦의 개인적 현창이란 측면에서 본다면 과거 제명천황조에서 蝦夷와 숙신 정벌에 혁혁한 공을 세운 阿倍比羅夫가 있었듯이 당시 일족의 외척(藤原仲麻呂의 외가)이었던 아베씨의 존재감을 상기시킴으로써 상대적으로 藤原仲麻呂-朝獦가문의 존재감을 드러내려고 하였던 것이 아닐까 추정해보았다. 아울러 비문의 ‘말갈국’은 발해국과는 무관한 존재이며 아직 국가 형성에 이르지 못한 蝦夷를 ‘蝦夷國’으로 표현한 것처럼 ‘말갈국’ 또한 종족 개념에 입각한 일종의 지역 표시 개념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는 점을 분명히 하였다.

목차

국문초록
1. 문제의 소재 - 多賀城碑文과 말갈국
2. 多賀城碑文의 검토
3. 藤原仲麻呂의 ‘新羅征討’ 계획과 蝦夷經略
4. 藤原朝獦의 일족 顯彰과 蝦夷 · 말갈 · 발해
5. 맺음말
참고문헌
日文抄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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