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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김윤주 (서울시립대학교)
저널정보
서울시립대학교 서울학연구소 서울학연구 서울학연구 제66호
발행연도
2017.2
수록면
43 - 72 (30page)
DOI
10.17647/jss.2017.02.6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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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구는 조선 초기 수도 한양에 유교와 불교의 두 공간이 공존하고 있었음을 다루었다. 조선 건국세력은 조선을 유교적으로 이상적인 국가로 건설하려 하였 고, 그에 따라 국가 공인 사찰의 감축, 사찰의 경제적 기반 축소 등의 척불 정책 을 수행하였다. 이는 정치·사상적 변화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했던 수도 한양에 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불교를 숭신했던 태조 이성계는 한양 천도 과정 속에 서 수도의 모든 것이 새롭게 구획·건설되는 중에 흥천사, 지천사, 흥복사, 흥덕 사 등 4개의 사찰을 건립하였다. 경복궁 앞쪽의 육조거리를 지나고 개천을 건너 가면 흥천사와 지천사가 연달아 보이면서 남대문으로 이어졌다. 창덕궁의 동쪽 위로는 성균관이 있고, 그 옆으로 동소문 가는 길목에 흥덕사가 있었다. 양 궐 중 간의 너른 땅에는 흥복사가 위치해 있었다. 궁궐 깊숙한 곳에는 국왕이 간략하게 불사를 행할 수 있는 불당도 건립되었다. 기존 개경의 사찰 수에 비할 수는 없지 만, ‘억불’ 정책을 전면에 내세운 국가의 수도로서는 적지 않은 규모였다.
이러한 태조의 사찰 건립은 수도 한양의 정체성을 완전히 유교적인 것으로 만 드는 데 걸림돌이 되었다. 흥천사 등의 사찰에서는 불교 의례가 자주 행해졌고, 그 규모도 작지 않았다. 불교 의례에서는 가뭄 등의 천재지변을 극복하려는 노력에서부터 왕실 구성원의 상장례, 救病, 祝壽와 관련한 의식이 행해졌다. 그리고 사찰이라는 제한된 공간에서 벗어나 도성 곳곳의 거리에서도 연등, 가구경행 등 이 행해지기도 했다. 이렇듯 조선이 불교를 이단으로 배격하고 성리학 위주의 사 회를 건설하기까지 꽤 오랜 세월이 걸렸고, 수도 한양 안에 불교 사찰이 사라지 기까지는 약 100년의 기간의 소요되었다.

목차

Ⅰ. 머리말
Ⅱ. 한양 도성 내 불교 사찰의 건립
Ⅲ. 불교 행사의 개설과 한양 사람들의 참여
Ⅳ. 맺음말
참고문헌
국문초록
ABSTRACT

참고문헌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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