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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강대학교)
저널정보
한국국학진흥원 국학연구 국학연구 제36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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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 84 (44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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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키워드

박의장朴毅長은 임진왜란을 맞아 일본 제2군 선봉장 가토 기요마사[加籐淸正]에게 경주성을 빼앗겼으나, 자신의 임지인 경주부를 이탈하지 않았다. 그는 경주부 죽장현으로 들어가 흩어진 관·민인들을 불러 모아 경주부수복을 위한 진열을 재정비했다. 패전 후, 그의 행적은 경상좌도 다른 관군장수들의 태도와는 다른 것이라 생각한다. 필자가 박의장의 임란기 활동과 행적을 주목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가 패전 후에 경주부를 이탈하지 않았던 것은 그의 사명감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한다. 즉 그는 ‘지방을 맡은 사람은 그 땅을 위해 죽어야 한다’는 사명감을 갖고 있었고, 이것은 그가 군 지휘관指揮官과 목민관牧民官으로서 경주부를 위해 진력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었다. 1592년 9월 7일 박의장은 경주성을 일본군에게 빼앗긴 지 5개월 만에 수복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경주성 수복의 전공은 그의 것으로 기억되지 않고 있다. 『징비록懲毖錄』에는 경상좌병사 박진朴晉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에 필자는 박의장의 문집인 『관감록觀感錄』과 『선조실록宣祖實錄』·『난중잡록亂中雜錄』·『기재사초寄齋史草』 등의 기록들을 비교·분석하여 경주성 수복 전투의 전공 여부를 재검토하였다. 그 결과 박의장은 제2차 경주성 수복 전투에서는 주도적으로 작전을 펼쳤으나, 그의 전공戰功은 인정되지 않았다. 전공을 둘러싼 논란은 명령과 실제 참전여부를 파악한 후 평가해야할 필요가 있다.
경주는 임진왜란이 종결될 때까지 일본군과 대치하였던 경상좌도의 최전선 기지였다. 이러한 경주의 군사적 중요성으로 인해 명군이 주둔하였고, 조선 조정도 전란 기간 내내 경주방어를 위한 군량 확보와 방어책을 고심하였다. 정유재란기 경주는 조·명연합군에게 울산성의 가토 기요마사를 공격하기 위한 수비의 거점으로서 매우 중시되었다. 임진왜란기 경주의 군사적 동향을 살펴봄으로써 경주부윤 박의장의 행적을 보다 객관적으로 이해하고자 했다.
그의 임란기 행적 가운데 관군으로서 가장 차별화되는 것은 목민관으로서의 치적이다. 그는 전시상황에서 경주부윤으로서도 경주부민들의 생계와 안정을 위해 노력하였다. 그는 일본군과 지속적으로 전투를 전개하면서도 백성들에 대한 구휼의 노력을 아끼지 않았고, 부민들의 나이와 건강상태를 고려하여 병농분리 정책을 실시하여 정병精兵을 양성하기 위한 노력도 병행했다. 한편 그는 경주에 주둔한 명군明軍의 접대에도 최선을 다했다. 이러한 그의 임진왜란기 활약과 전시행정戰時行政은 경주부의 전후戰後 복구사업에도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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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요약
  2. 1. 머리말
  3. 2. 경주성의 수복收復과 전공을 둘러싼 시비是非 검토
  4. 3. 강화협상기와 정유재란기 경주의 군사적 동향
  5. 4. 경주부윤 박의장의 전시행정戰時行政
  6. 5. 맺음말
  7. 참고문헌
  8. Abstra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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