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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朴道植 (강릉원주대학교)
저널정보
역사문화학회 지방사와 지방문화 지방사와 지방문화 제22권 제1호
발행연도
2019.5
수록면
127 - 158 (32page)
DOI
10.17068/lhc.2019.05.22.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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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강릉에는 성황사에서 봄가을에 지방관이 주도하는 읍치성황제와 단오 때 향리가 주도하는 성황제(단오제)가 있었다. 지방관 주도의 공적 제사로 기능하던 읍치성황제는 조선후기까지 변함없이 지속되고 있었다. 그러나 고려시기까지 단오 때 향리가 주도하는 성황제는 조선시대에 들어와 음사(淫祀)로 간주됨에 따라 금단의 대상이 되었지만 여전히 성행하고 있었다.
허균이 1603년(선조 36) 여름에 강릉단오제를 구경할 때 강릉단오제의 주신은 김유신 장군이었으나 의금부 서리가 폭사한 1762년(영조 38)의 기록에는 범일국사로 교체되어 있다. 따라서 강릉단오제의 주신이 김유신 장군에서 범일국사로 교체된 시기는 1603년(선조 36)에서 1762년(영조 38) 사이에 있었다고 하겠다.
강릉단오제의 주신이 교체된 원인으로는 향촌사회 내의 사회적 환경의 변화, 민간신앙의 성행, 향리제도의 성격과 역할의 변화를 들 수 있다. 이상과 같은 요인에 의해 강릉단오제의 주신이 교체됨에 따라 단오 기간 중에 대성황사의 12신과 대관령국사성황에 대한 치제는 함께 이루어졌다. 그러나 1894년 갑오개혁 때 대성황사에 봉안되었던 12신을 땅속에 묻어버리면서 12신은 제의와 축제의 현장에서 사라졌고, 강릉단오제는 국사성황이 주가 되는 축제로 그 범위가 축소되고 축제의 형식도 8단오에서 5단오로 바뀌게 되었던 것이다. 그 후 일제는 1909년에 축제의 중심 공간이었던 대성황사를 훼철하였고, 그곳에서 진행되던 강릉단오제를 금지하였지만 강릉단오제는 계속되었다.

목차

초록
1. 머리말
2. 강릉단오제의 주신 교체 시기
3. 강릉단오제의 주신 교체의 역사적 배경
4. 맺음말
참고문헌

참고문헌 (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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