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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널정보
온지학회 온지논총 온지논총 제38호
발행연도
2014.1
수록면
69 - 120 (52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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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는 ‘중국은 큰 나라로 섬기고 이웃한 일본이나 여진과는 평화롭게 교류한다’는 사대교린(事大交隣)을 외교방침으로 정했다. 그러나 일본학자는 ‘사대’를 외교방침으로 보지 않고, 민족성으로 확대시켜 주체성도 없이 크고 강한 나라에 기대어 복종함으로써 자신의 존립을 유지한다는 뜻의 ’사대주의’라는 악의적인 용어를 만들어내어 자국의 조선 강점을 합리화했다. 중국과의 외교는 부경사행(赴京使行)과 사신접대(使臣接待)로 이루어지는데, 본고는 사신접대의 일환인 사신연(使臣宴) 의례를 분석하여 사대(事大)의 면모 및 의례의 변천을 밝혔다. 의례는 사람 사이의 마땅한 관계 및 그 시대의 가치관이 상징정인 행위로 표현된 것이므로, 이를 통해 그 시대의 사고방식을 엿볼 수 있다.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1474년) 「연조정사의(宴朝廷使儀)」에서는 왕과 사신이 서서 직접 차와 술을 주고 받았으며, 찬안(饌案)⋅소선(小膳)⋅대선(大膳)도 또한 차비관원(差備官員)의 도움을 받아 서로 직접 올림으로써 극진한 공경을 표했다. 또 차비관원이 과일⋅꽃⋅탕을 올릴 때, 빈 찻잔을 받거나 고기를 썰 때 왕 앞에서는 무릎 꿇지만 사신 앞에서는 서고, 왕세자와 종친이 왕에게는 무릎 꿇고 술을 올리지만 사신에게는 서서 올림으로써, 왕과 사신에 대한 예절에 차등을 두어 중국에 사대(事大)를 하면서 조선의 국체(國體) 지키고자 했다. 왕세자가 사신에게 연향을 베푸는 「왕세자연조정사의」에서도 차비관원과 재신(宰臣)이 왕세자 앞에서는 무릎 꿇지만 사신 앞에서는 섬으로써, 왕세자를 왕통의 계승자로서 중국 사신 앞에서 예우했다. 조선에서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왕과 사신의 관계’ 및 ‘왕세자와 사신의 관계’가 의례로 이렇게 표현된 것이다. 즉, 중국에 대해 제후국으로 자처했지만, 독립국으로서의 자존심을 지켰던 것이다. ‘왕(또는 왕세자)과 사신이 서서 차와 술을 서로 직접 올리고, 차비관원의 도움을 받아 찬안⋅소선⋅대선을 서로 직접 올리던 『국조오례의』 사신연 방식’은 1648년(인조 26)을 기점으로 확연히 바뀌었고, 또한 이보다 앞서 1645년(인조 23) 이전 언제인가부터 ‘왕(또는 왕세자)과 사신을 대하는 예절에 차등을 두던 『국조오례의』 사신연 방식’도 바뀌었는데, 전자는 청 세조의 명에 의한 것이고, 후자는 중국 사신측에서 언짢아하기도 했거니와 우리측에서도 손님과 주인의 예를 달리하는 것을 마땅하지 않게 여겼기 때문이다. 이렇게 변한 사신연 의례가 『통문관지(通文館志)』(1720년)에 반영되어 실려 있다. 『통문관지』의 사신연 의례에서는 차비관원이 왕과 사신에게 꽃⋅탕⋅과일 뿐 아니라 차와 술 및 찬안⋅소선 등까지 올림으로써 왕과 사신이 다례를 행할 때부터 연향을 마칠 때까지 죽 앉아서 간편하게 의례를 행할 수 있었고, 차비관원이 왕과 사신 앞에서 모두 무릎 꿇고 예를 행함으로써 왕과 사신에 대한 예절에 차등을 없앴다. 이는 1897년 대한제국 선포 이전까지 지속적으로 시행되었다. 『국조오례의』와 『통문관지』의 사신연 의례는 어느 경우나 주인으로서 당당하게 손님을 정성껏 대접하는 방향으로 의례가 제정되었지, ‘사대주의’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주체성이 없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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